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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희롱하며 대성으로 깔깔대고 웃었다. 이를 보고 선생이 쫓아가 면 도망가다 내렸다. 따라 내리면 역원(繹員)이 선생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니 열차는 떠나고 그 날은 등교를 못해 수업을 받지 못했다. 당시에 는 통근을 위한 기차가 화차에 연결되어 다녔을 뿐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 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4월이 학년초) 선생은 2학년 학급의 반 장으로 한국 학생을 인솔하여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하는 타교생들이 이 들을 보자 반겨주기는커녕 도리어 경계를 했으나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보 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자 차츰 수그러져 거사계획을 의논해 왔다. 왜냐하 면 관립학교 학생들은 일본의 앞잡이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사 통 고도 안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거리로 나가 목청 높여 만세를 부르 고 거리를 활보해도 일본 헌병은 의외의 거사에 상부에서의 행동지칩을 받지 못해 첫날은 수수방관하였다. 3월 2일 선생은 당시의 각 역인 시흥역(始興繹) , 안양역(安養繹) , 군포 (軍패繹)에서의 독립선언문 배포와 군포장(軍꽤 5일장)에서의 거사를 맡 았다. 그래서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선언서를 뿌리면서 어제의 파고다공 원 동립운동 시위 상황을 알려주었다. 군포역에서 시장(市場)까지 가면서 선언서를 돌리며 시장으로 모이게 하여 군포장에서 상당수가 모인 가운데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어제 서울에서 있었던 만세시위 상황을 설 명하고 질문을 받으며 참석한 군중과 함께 만세를 목청이 터지라고 힘껏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단 중심으로 제2차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3월 1 일에 결정을 보아 3월 4일에 배재고보(培材高普) 기숙사에 모여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 와 중등학교 학생대표가 모인 연석회의에서 3월 5일에 시위하기로 결정을 보고 최고 지도자로 강기덕과 김원벽을 추대하였다. 따라서 3월 4일 밤에 세브란스 의전 구내에서 강기덕 한의건 장기욱 전옥결 등이 모여 시위 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행동방법을 토의 결정하였다. 같은 날 3월 4일 밤에 안국동의 박태병 집에 중학교 김종현, 경성고보 최강윤, 사립국어 보 급학원 최순병이 모여 동숙하면서 거사 규모를 확대하기 위하여 ‘경고’라 는 제목으로 격문을 작성하였다. 선생은 3월 5일인 거사 일에는 등교하자마자 학생들을 집합시켜 인솔하 고 교문을 박차고 서울역으로 달려가 만세를 부르며 선언서를 거리의 군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