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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이 품앗이로 밭의 김을 매고 있는데 일본 경찰이 근처 길을 지나 다 난데없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자기에게 인사 없이 일만 한다는 것이다. 일하던 농민들이 고개를 들어 소리나는 쪽의 그를 바라보자 그는 화를 더 내므로 보다못한 한 건장한 청년이 우리는 김을 메느라 보지 못 하여 그랬을 뿐이라 하니 그대로 달려와 건방지다며 청년을 마구 구타하 였다. 매를 맞은 청년은 “이유 없이 왜 때리느냐”며 항변하니 경찰은 그 를 포승으로 묶어 연행하니 농민들은 전부 일을 포기하고 따라나섰다. 경 찰은 부락의 유지인 조참판(퍼參判) 댁으로 데리고 가서 참판 입회 하에 청년을 꿇어앉히고 옆에 있는 모탕(나무를 패거나 물건을 쌓을 때 밑에 괴는 토막나무)을 들어 내리쳤다. 청년은 어금니를 지긋이 물고 “응”하고 용(뽑)을 쓰니 포승이 힘없 이 끊어졌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청년 이 일어 나니 경찰의 안색이 하닿게 질리었고 둘러섰던 주민들은 숨을 죽였다 묵 묵히 지켜보던 참판이 한참만에 입을 열어 “처자식과 부락을 위해 자네가 참게, 더 큰 후환(後젠、)을 생각해야지" 어른의 말씀에 청년은 황소 같은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무릎을 끓었다. 경찰은 이번에는 빨래 줄을 가져다 가 다시 묶고 매질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서당에서 돌아오다 전부를 목격 하고 어린 마음에도 울분을 참기가 어려워 집에 돌아가 조부님께 보고하 니 그때 이름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1910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속국인 식민지 노예가 되고 권력은 일본의 손에 있었다. 당시 중등교육은 민족학교로 시작한 사립학교가 있 었고 일본이 세운 관립학교가 있었 다. 선생은 이때도 고민을 했다 왜냐하 면 부친은 원수인 왜놈의 공부는 필요가 없으니 사립으로 가라는 것이고 선생은 일본을 이기려면 그들 속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고 그들을 똑똑 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위험해 도 소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일본을 제대 로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부친에게 간정하여 3일 만에 허락을 받고 일본 학생들이 공부하는 경성고등보통하교(京城답等핍通쩔校 : 현재 경기고교 (京離답校) 에 입학하고 경기도 안양(京靈면 갖養)에서 기차(汽파) 통학을 시작했다. 그러나 열차 내에서 일본 학생의 추태가 정도를 넘었다. 예를 들면 일본학생들은 몰려다니며 우리나라 여성의 저고리 깃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으니 브래지어가 없던 시대라 기겁을 하면 이번에는 머리탱기를 잡고 돌리면 돌다가 넘어졌다. 일본 학생들은 가축을 매만지며 놀 듯이 7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