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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작전 계획에 의하면 전국(戰局)의 진전과 함께 우리 광복군의 작전 방 략도 크게 확대되었음을 볼 수 있다. 즉, 종 래 군의 공작 활동은 대개 중국 관내의 적 일본군과의 전선 전후방에 한 하였던 것이지만, 이때에는 중국 경내에서 동북지역, 즉 만주 방면으로까지 공작 구역이 확대되었음은 물론, 만주 방변에서 다시 국내로 연장되고 한 걸음 더 나 가서 는 태평양 방면까지 확장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광복군의 태평양 지구 사령 부 설치 와 함께 공군 건설 계획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 參考文敵 : 獨立運폐1史(國家報勳處) 第6卷 403.404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惠b處) 第5卷 1029面 6) 한 흥 리 (韓 興 屬) 이명 : 항길 ('r~吉) 1897. 8.15 (음7.18) - 1979. 5. 8 (음4.13) 몽당 한흥리(夢堂 韓興題)는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이며 새마을운동가이다. 선생은 1897년 8 월 15일 경기도 부천군 문학면(文學面) 동춘리(東 春里)에서 부친 한용익(韓用靈)과 모친 정필택(鄭 弼澤)의 3남 l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本 貴)은 청주(淸州)이고 원명(原名)은 흥리(興複)이 며 아명은 정봉(T鳳)이고 개명 (급改t名)은 항길(이j↑l 吉)이 고 아호(雅號)는 몽당(夢堂)이 다. 한흥리 선 생의 이름에는 그 시대에 살던 할아버지의 갚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 다. 즉 흥(興)과 리(複)는 선생이 8세 되던 해인 1904년에 우리나라를 다 시 일으키라는 의미에서 작명(作名)되었으며, 특히 이 시기는 일제의 한국 침략 야욕이 팽배하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 민족의 한(恨)을 씻고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민족애(民 族쫓) 정신이 담겨 있었다. 선생은 10세가 되는 1906년까지 조부(祖父)로부 터 천자문(千字文) . 동몽선습(童豪先習) . 유년필독(회年必讀) . 소학(小學)을 배우고 그 후는 서당(書堂)에 다녔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한 성 격이었으나 최초로 반일(反日)감정이 생긴 것은 11세 되던 해였다.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