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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때뼈聽)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 연구부(介雷~~R究部) 위원장이 었던 선생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였다. 이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 성(金容成) . 이사 송헌주(太憲樹)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 (korea and Pacific War)J 이 란 비망록을 작성, 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 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 >란 잡지에 < 한국과의 교역을 권힌~ct(Do Business with Korea)> 라는 기고문을 게재 하여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 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 연안 127H 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 의 에 정 한 경 · 전 경 무 (m 刺 파) 등 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공론화 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 미국의 한국침투작전 인 냄코작전(Napko Project)에 의거하여 캘리포니아에 설치된 한인훈련부 대에 입대하여 훈련받았다. 일찍부터 미국내 한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 지해온 oss 워싱턴본부의 에 이 플러 (Carl F. Eifler) 대령과 교육훈련부서 책임자인 굿펠로우(Preston Goodfellow) 대령은 유일한 · 장석윤 등과 협 의하여, 한인 전쟁포로를 잠수함으로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계획을 수립하 였다. 이것이 댐코 작전이다. 침투목적은 한반도 내에 첩보망을 조직하고, 한반도에 추락하는 미군 조종사를 구출하며,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는 것 이었다. 1개조 5명 이내 10개조의 공작원을 파견하고, 각 조 대 원들을 서 로 모르게 훈련시킨다는 것 이 었다. 한국에 상륙할 때에 는 각 조당 l만 5000엔을 소지하며, 한국의복 일 제 안경 무선통신기구 등을 휴대토록 하였 다. 공작원들은 반일감정이 가장 농후한 지역에 지하훈련소를 만들고, 무 장유격활동을 준비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대원들은 무기 · 비무장 전투법 · 지도 읽기 · 파괴 · 무전 · 촬영 · 낙하산 훈련법 · 비밀먹 사용법 · 선전 · 일본인의 특성 등에 관한 훈련을 받았다. 1945년 3월 실제 한반도에 투입될 2개조가 편성되었다. 선생은 4명의 유학생과 황해도 출신의 노무자로 구성된 제l조의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l조는 인천지역으로 잠입키로 결정되었다 최종단계에서 선생은 자신의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