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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22년 대학동창생인 스미스와 함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 (La Choy)식품회사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하자, 1924년 국제무역회 사인 유한주식회사(柳韓林£현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서재필을 임명하였 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 구매 차 상해를 거 쳐 북간도 지역을 순회하며 21년만에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기도 하였다. 1925년 세브란스 의전(醫專)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청을 받은 선생은 회사를 정리하고 192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 해 12월 서울 종로에서 유한양행(柳韓반行)을 창립하고 초대 사장에 취임하 여 의약품 · 위생 · 화장품 · 농기구 · 염료 등 사업을 다각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사업수단을 발휘하여 수익을 올리는 한편, 보스톤에서 <한국에서의 소년시절 (When 1 was a boy in Korea)>이란 책자를 출간 하여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과 교역을 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선생은 귀국한 지 12 년 되던 해인 1938년 4월 재차 도미하여 사업 활성에 전력하는 한편, 1941년 남가주대학(USC)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 독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찌싸微)과 민족전선 (f\;族戰協)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중 · 일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과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 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 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 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따썽)가 조직되었고, 선생은 미 주 로스엔젤레 스에 설치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폐行部)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 가를 얻어 로스엔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 (益jE휠)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댐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 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 (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 여사와 교류하기도 한 선생은 통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感順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Ht{:)과 대한민 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돼헛昆)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 68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