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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하반기인 7월에는 조동린(趙東離)이 귀덕 · 개봉 · 신향(新쩨) . 석가장(石家莊) . 보정(保定) . 북평 · 천진(天빨) 등 각 지구를 순방하며 활 동상황 파악과 조직강화, 포섭, 동지 후송 등을 촉구하면서 개봉 · 귀덕에 서 민치대(閔致大) 등 10여명을 인솔하고 귀대하였다. 이 시기에 송병하(宋炳河) 선생은 조동린의 의하여 9월 하순에 이영수 (李英守) . 김군남(金띔南) 등과 함께 제3지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초모활동을 하는 데는 많은 재원이 필요했는데 최규런의 경우는 자기가 운영하던 운수업용 트럭 수대를 처분하여 90여만원(元)이란 거액 을 지대에 헌납하여 적 후방 공작비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초모 작전에 주력한 제3지대는 초모 인원이 300여명에 이르는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제3지대장 김학규는 대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부양현(핸陽縣)에 주 둔하고 있는 중국군 제 10전구(戰區) 사령관 탕은백(楊恩伯)과 교섭하여 중국 군 훈련기관인 중앙육군 군관학교 분교(교장 장개석(體介石))에 한 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인 한광반(韓光班)을 설치하였다. 한광반 설치의 주요 목적은 첫째, 한국독립 전선에 필요한 간부 양성 둘째, 중국 군과의 연합작전 기능의 강화 셋째, 독립 후 국군의 기간요원으로서의 간부화 등이었다. 한광반의 군사훈련과정은 중국군 군사교관이 담당 지도하였으나 그 밖 의 과정은 김학규 지대장이 직접 훈련주임이 되어 주로 정신훈련과 사상 선도에 주안을 두어 한국 독립운동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연혁, 광복군 창군의 의의, 건국강령, 세계혁명사 등을 전담하는 동시에 한광반의 설치 목적을 명백히 밝혀 주었다. 교육훈련 기간은 5개월이었으며 제 1기생 50명을 전원 중국군 준위로 임 명되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초모활동과 선짚공작의 효과로 인한 인원의 증가 에 따라서 자체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5년 3월 17 일 광복군 제3지대로서의 정식 편성과 함께 자체 훈련대를 구대(뭔|隊)로 편성하여 구대장에 빅-영준(朴英俊)이 취임하고 구대 밑에 3개의 소대를 두고 남자 2개 소대 여자 1개 소대로 나누었다. 그리고 제2소대장에 송병 하(양炳河) 선생이 임명되고 각 소대에 조교 약간 명을 두어 신입대원에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