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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광복군 제3지대의 활동은 크게 진전하고 있었다. 1944년 상반기에 조동린 (3iiiii熾) 등 전방 공작원들의 노력으로 북평(北 平) . 개봉(開封) . 귀덕(歸’德) 등지에서, 배경진(裵퍼鎭) . 배여성(裵經켈)을 비롯하여 선우진(젠f鎭) . 김중섭(金件쌍) . 김중호(金件浩) . 김상걸(金尙 杰) . 이성봉(李成鳳)과 같은 애국청년들이 제3지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또 학도지원병(댈徒志願兵)이라는 미병 아래 일본군 부대에 강제로 입 대하였던 한국학도병들이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공작원의 안내를 받든지 또는 독립군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일본군의 병영 을 탈출하여 광복군의 입대하였다. 이들 중에는 한성수(韓필沙) . 이상일(주셉←→) . 김성환(金聖煥) . 장준하 (張俊河) . 윤경빈(尹慶‘H~) . 임승헌(林承憲) 등 30여명이 주로 서주(徐'l'i'1)지 구에 있던 일본군 병영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특히 이 들 중에 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속해 있으면서 중국군과 대치하여 교전(交폐)중에 있다가 일본군에서 필사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야간을 이용하여 일본군 병영을 비밀리에 탈출했다가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을 받으며 구사일생으로 중국 유격대 지역으로 와야 했다 이렇게 어렵게 중국 유격대 지역으로 들어와도 중국 유격대 측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까다롭고 스파이 혐의의 유 · 무, 탈출 동 기, 본인의 요망사항 등에 관하여 엄격한 심문을 거쳐 광복군 진영에 이 르게 되는데 그 동안 여러 중국 유격대 부대를 거칠 때마다 까다로운 심 문을 받아야 하는 등 무수한 사선을 통과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들과 같이 탈출하던 학도병 중에는 일본군 병영을 탈출하다가 왜군의 추격을 받아 애석하게도 비명의 쓰러져 간 분도 허다하였고, 왜병 으로 오인 받아 중국 유격대의 총격에 희생되거나 방향을 잘못 잡아 공산 진영으로 들어가게 된 애국청년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각 지역에서 많은 애국청년 학도들이 모이게 되자 제3지대장을 맡고 있던 김학규(金學쫓)는 중국 제 10전구 사령부 및 광복군 총사령부에 모여진 대원들의 실정을 보고하고 이들을 훈련시킬 계획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군 중앙군관학교 제 10분교 내에 한광반(歸光班)을 설치하는 데 합의를 보고 50여명을 입교 시켜서 훈련을 하였다. 여기서 훈련받은 대원들은 각 지역으로 파송되어 초모 활동에 주력하였다. 62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