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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長) 주심 하에 공판, 징역 5개년의 실형 언도를 받았으며, 대구형무소 제지공장 에서 작업 중 악독한 고문의 결과 극도로 건강이 쇠약해져서 형무소내 병감에 수감되어 있다가 중환자로 인정되어 1945년 7월 하순 병보석으로 출감 고향에 돌아와, 자택에서 경찰서형사의 상주 감시 하에 지정병원인 구세병원(救世病院) 에서 치료를 받고 오던 중 군국일본(軍國 日 本)의 패망으로 8. 15의 해방을 맞이 하여 자동적으로 형집행은 면제되고 완전한 자유의 몽이 되었다 해방 후 약 일년여,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상경하여, 이승만(李承뺑) , 전 진한(錢鎭漢)씨 등과 함께 독럽수립의 기틀을 위하여 헌신해오다 다시 건강이 악 화되어 휴양하면서 갈팡질팡하는 정치생활에서 잠시 물러나서 올바른 인재를 양 성하여야 국가가 바로 잡히겠다는 일념하에, 당시 국민대학(國民大學)의 창설자 인 신익희($寶熙、) 선생과 손을 잡고 국민대학의 부학장을 약 3년 지내다가 좀더 인재양성의 폭을 확대하기 위해 육영사업경영에 15년간 헌신하다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모든 직(職)에서 물러나 경기도 양평(楊平)의 야산에서, 하루 속히 조국 통일을 이루어 세계에 으뜸가는 독립국가가 되기를 매일매일 기원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99년 4월 6일 별세하였다. @ 參考文敵 : 身分l帳指放照會回報書 姜仁姬(金雲鳳 先生의 歸) 女史의 證言 3) 송 병 하(宋 炳 河) (1926. 12. 12 - 송병하(宋炳河) 선생은 평안북도 의주(義州)사 람으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훈련대 제2소 대장에 임명받고 교관 등 군사훈련에 주력하였다. 선생이 소속되었던 광복군 제3지대는 중국 부 양현(핸陽縣)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활동 내용 을 살펴보면, 우선 초모공작(招幕I作)(군대의 지 원병을 불러모으는 일)을 들 수 있다 1944년 태평양전쟁이 연합군의 본격적인 공세와 함께 미 공군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으로 전세(戰찢)는 급전직하(急轉直 下)로 왜군의 패색(敗色)이 짙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군 점령지구 에서는 우리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극치에 달하고 있었지만 우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