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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생각이 갚이 마음속을 흔들어 결연코 고문준비(高文準備)를 포기하고 고통스럽 기는 하나 내일의 자유와 그리고 조국의 영광을 위하여 독립투쟁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더욱이 1939년 3월 고향인 고성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 는 졸업식 축하연설을 하였다는 이유로 고성경찰서(高城警察뿔)에 연행되어 10일 간 구류 처분을 당하고 나서는 더욱 독립투쟁을 할 결심을 굳게 가지게 되었다. 독립운동활동 개시(開始)는 이러한 上記 등으로 인해 심각한 결의와 각오를 한 선생 은 독립운동 투쟁목표를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1) 일제에 철저항거, 무저항 비협력주의 투쟁으로 싸우고 2) 모든 기회와 방법을 이용하여 일제의 전쟁력(대동아전쟁)을 파괴 내지 약화 를 기도하고 지원병 제도를 방해, 방지하며 3) A.B.C.D LINE(영미(핏美)구축연합전선)에 의한 군국주의 일본의 패전패망 과 이에 결과로 우리 조국의 독립이 올 것을 동포들에게 인식, 선도하여 조국광 복의 독립투쟁정신을 앙양, 선도하는 공작 4) 재미(在美) 이승만(李承Hω) 박사와 재중국(在中國)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 九) 선생과 연락, 국내외에서 호응하여 조국독립연합전선을 결성 투쟁하고 5) 군국주의 일본의 전세약화 내지 패전시 군중봉기 및 무력궐기(각 경찰서 무 기고 탈취 방법)로 독립을 실력으로 쟁취할 것 등의 목표로 동경유학생을 기간으 로 당시 조선 전역의 전문학교 학생 및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총망라한 지하학 생독립단의 조직에 착수하였고, 우선 동경중앙대학 재학중인 동기동창 장구(전 한일경제협회사무국장(韓日經濟協會事務局흩) . 고담룡(高港龍)(전 자유당 국회의 원) . 장사건(張師健)(전 법무부특검계장) . 신기현(申箕鉉) 이상 대구형무소(大邱 꺼務所) 옥중동지들과 함께 독립단 조직을 확대 강화하였다‘ 1942년 9월 중순경 상기 장사건(張師健)의 고향인 경북 영주군(榮州컴15 ) 풍기 (豊基)에서 경찰서 고등주임(高等主任) 서영출(徐永出)에 의하여 장사건(張師健) 이 체포되어 지하학생독립단의 정체 일부가 발각되자 천하악독한 일제경찰의 앞 잡이 서영출(徐永出)에 의하여 상기 동지들은 차례 차례로 검거되었고, 본 사건 의 주모자로 지목된 선생은 경북 대구검사국(太邱檢펠同) 계(界 . 사가이) 검사가 발부한 구인장에 의하여 1942년 9월 20일 자정 동경시(짜京퍼)풍도구(뿔鳥l쿄)동 장기(東흩뼈)에 있는 염기장(J값倚莊) 아파트에서 동경경시청형사 3명에게 체포 되어 그후 부산, 대구, 영주, 봉화경찰서의 순으로 전전(꽤패) 이송(移送) 또다시 영주경찰서에 이송 수감되어 그간 약 l개여년 형용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과 섬 문 끝에 또다시 대구검사국에 이감(移맘), 심문을 받은 후, 당시 정치사상범구치 소였던 대구형무소 제3구치장에 수감되었고 423번이라는 죄수명찰을 달고 대구 지방법원 예심부에 회부되어 약 1개년간 거의 매일같이 예심재판부에 끌려다니 면서 심문을 받은 후 1944년 10원 대구지방법원에서 담당검사 고도재판장(1다,파했 60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