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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일제의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일시 휴양하 다가 올바른 인재양성을 위하여 약 3년간 국민대학에서 부학장직을 역임 한 후, 다시 15년간 육영사업에 헌신하다가 건강이 악회되어 경기도 양평 (楊수)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중 1999년 4월 6일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 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부(해) 강인희(姜仁柳) 자(子) 김녹양(金級 |껴) . 해양(海陽) . 성천(싸天) , 자부(了따) 오명혜(섯 U꺼惠) , 손(孫) 정호CïT 때)가 있다 <참조> 김운봉(金雲鳳) 선생의 부(麻) 강연희(姜仁姬) 여사(女빚)의 증언 김운봉(~띨l따)은 농업을 하시면서 서당(벅'y)을 경영하신 김만수(金萬퍼)의 4 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에 일인과 공학하는 강원도 춘천고등학교에 엽학하여 타학생 특히 일인학생에게 져서는 안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매 학기마다 급장으로 임명되었고, 한 학 년 3학기 제도였던 당시 선생은 5학년 졸업할 때까지 13번 급장을 하였고 2번 급장에 임명되지 못한 것은 4학년 때, 한인은 급장이 될 수 없다는 일인 학생들 의 반대가 있어서, 그 때 일인학생을 때렸다는 이유였고, 또 한번은 한인학생을 멸시 차별한 일본인 광전(파버) 선생을 배척하는 스트라이크를 주모하였다는 이 유로서 품행 ‘병(띠)’을 낙인 찍혀 급장을 못했던 것이다, 당시 전교 대대장이었 던 선생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고, 경찰서에서 5일간 구류를 당하였다, 이러한 R'펴;의 우리 민족을 짓밟는 태도와 처사에 대하여 억울함과 망국의 비 애를 느낀 선생은 너무나도 조국이 그리웠고 악독한 일인들을 물리치고 하루 속 히 독립된 자유의 닐을 찾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대학(京城人젠)에 응시하여 학과시험에는 합격하 였으나 구두시험에서 사상이 나쁘다는(소견서) 이유로 불합격이 되었다, 이에 선 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중앙대학(찌京中싸太행) 예과(웠科) 2학년에 편입하였 고, 예과를 수료하고 법학부에 올라가 고등문관시험 준비를 시작하였으나,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라 할지라도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어 있는 일인들, 특히 동경(束 京) 거리의 일인들의 희희낙낙(환흰樂樂)한 자유스러움을 볼 때, 항시 경찰의 감 시 속에 부당수색, 차별대우 냉대 등을 받아야 하는 우리민족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본들 무슨 정신적 기쁨과 행복이 있으랴 하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