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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 용 산 (金 用 山) (생몰 미상) 김용산(金꽤iJ_l) 선생은 부천군 소래면 대야리 출신으로 일제 말기 일본 동경 공옥사공업학교(攻玉社I業學校) 재학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1944년 동경도 황천구 일모리정(日 萱댄-메) 2-77번지에 거주하면 서 공업사공업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선생은 경상북도 선산 출신 김종권 (金鐘備) . 경상남도 거창 출신 하영길(河永꼼,) . 경성 출신 원산영(元LLJ榮) 등 한국인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일제의 민족차별을 철폐하고 조국독립에 기여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일제 자료에서, 이 들의 대하여 쓴 내용을 살펴보면, “첫 째, 일본인은 입으로는 일시동인(→祝同人)을 부르짖으면서 , 우리동포 를 경멸하고 차별대우하고 있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들의 민족의식과 반감 을 강화시켜 자연히 조선인 전체의 마음을 일치 단결시키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미국에서는 전보다 많은 독립운동지사가 도미하여 활동 중이고, 샌프란시스코에는 이미 조선공사관이 있어서 그 청사 옥상에는 태극기가 펄펄 휘날리고 있다. (이는 당시 하와이와 캘리포니 아를 중섬으로 활동하던 대한민국민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됨) 또 중국 중경(重慶)에서도 조국 독립운동의 선배지사들이 활동 중으로 일본이 패전하면 제일 먼저 조선 이 독립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들 선배 독립지사들이 지도할 것이므로 우 리는 이들을 도와서 훌륭한 독립국을 창설해야 한다. 셋째, 우리들은 장래 조선의 중견 인물이 되도록, 현재에 있어서는 사 상 · 철학 · 문학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면학하고 절차탁마(切麗珠뿜)해서 실력 배양에 노력하는 한편, 단결을 강화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라고 기술 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용산 선생과 동지들은 일제 말기 국제정세에 대 한 객관적인 평가를 토대로 자신들의 항일 진로를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의 민족차별을 철폐시키고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리자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을 기회로 미국 · 영국의 지원 밑에 독립을 성 취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들 스스로 조선의 중견 인물로서 동지적 단결을 굳게 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봉기해야 한다고 결론 짓고, 한인유학생을 상 대로 민족의식 고취와 동지 포섭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동경시내 품 rr. 부천의 독립만세 운동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