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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일본 경찰은 칼을 빼어 들고 무차별 휘둘러 군중 속의 이은선이 칼에 찔리어 목숨을 앓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임성춘 선생은 시위 군중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맞서 끝까지 항거하며 독 립만세 시위 운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직무집행방해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 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 參考文鳳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316-322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50-151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2卷 578面 5) 이 담 (李 價) (1879. 5. 17 - 미 상 ) 이담(李灌) 선생은 부천군 계양면 이화리 298번지에서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24일 같은 지역에 사는 심혁성이 주도한 장기리 시장에서 일 어난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독립만세 시위가 한창 진행하던 중, 시위대를 주도하던 심혁성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연행되어 가는 것을 보고 격분한 시위군중들과 임성춘 등은 심혁성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이를 거부하고 강 제로 연행하자 시위군중들은 일본 경찰을 포위하여 구타하고 심혁성의 묶 은 포승을 풀어 도주케 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시위군중들을 향하여 무차별 칼을 휘둘러 이은선이 그 자리에서 칼에 찔려 죽고 수명이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군중 속에서 이영춘(李永春)이 달려가 이은선의 죽음을 6촌이 되 는 이담(당시 41세) 선생에게 알렸다. 이담 선생은 곧 바로 면사무소로 달 려가 보니 시체가 면사무소 앞마당에 방치되어 있는 있어, 우선 시체를 소사가 쓰는 방으로 옮겨놓고 계양면 주민을 규합하여 일본 경찰에 항의 할 계획을 세웠다 ι 그리하여 계양면장 안병혁에게 달려가서 주민에게 알려는 통고문을 써 달 II. 부천의 독립만세 운동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