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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919년 3월 31일 같은 동네에 사는 송윤중(宋潤中) 집에서 오 창조(吳昌組)로 하여금 ‘4월 1 일 질천(많川)시장에 주민들을 모아 독립만 세를 외치라’ 는 내용을 작성케 하였다. 그리고 김춘근(金春根) . 윤영택 (尹永澤) . 박중일(朴重-) 등과 협의하여 그 통지문을 각 동리 구장들에 게 배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추진하던 독립만세운동계획이 일본 경찰의 사전 탐지로 미수에 그치고 선생은 일본 경찰에 피체되었다. 그 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고 6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했으나 기각되었으며 7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하였 다. @ 參考文敵 · 獨立運動史 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312-313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52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卷 214面 4) 임 성 춘 (林 聖 春) (1869. 3. 25 -1937. 7. 15) 임성춘(林聖春) 선생은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에서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24일 오후 2시 심혁성이 주도하여 장기리 시장에서 조선독 립만세 시위가 벌어졌을 때 엄성춘 선생은 선두에서 군중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날 오후 5시경 순찰 나온 일본 경찰 4명이 시위를 주도하던 심혁성 을 체포하여 연행하려 하자 뒤따르던 시위 군중들이 석방을 요구하며 강 하게 항거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이를 거부하고 계속 연행하려 하자, 임성춘 선생은 일본 경찰을 향하여 크게 소리치며 “어서 그 사람을 놓아 라. 놓아라" 라는 구호를 군중들 앞에서 선창하면서 일본경찰들 손에서 심혁성을 석방하도록 기세를 돋우었다. 이때 200여명의 군중들은 힘을 얻 어 “그 놈을 붙잡아라. 붙잡아라" 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군중들이 경 찰의 앞을 가로막자, 시위대 중에서 누군가가 일본 경찰의 머리를 치고 폭행을 가하며 심혁성의 묶은 포승을 풀어 달아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4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