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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서 물건을 나누어주었다. “나라가 없는데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느 냐” 하고 오리울에 있는 집과 농토를 헐값에 모두 팔아 자기가 3.1 운동 만세를 불렀던 그 황어장터에 나와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 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재산을 없애고 “나는 대한의 백성이지 왜놈이 될 수 없고, 왜놈을 위하여 단 한푼의 세금도 낼 수 없다” 하면서 처자식을 거 느라고 납부여대 두메산골로 은신하고 말았다.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또 강원도 심산유곡을 찾아 산( 111 ) 사람 30년동안 에 약초를 캐어다 팔아 연명해 가며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염원하면서 숨 어살았다. 또한 때로는 만주 등지를 왕래하변서 우국지사들과 만나 독립 운동을 거들었다. 원래 타고난 성격이 쾌활하고 의리가 있어 3.1 만세운동의 거두 손병 희 선생의 의거가 그의 애국심을 북돋아 준 것이라 믿어진다. 선생은 8 .15 해방 후 산 사람 생활을 걷어치우고 맨손 맨주먹으로 태 어난 고향 풍산 심씨 마을인 한돌(현:백석동)로 돌아와 여생을 조국에 이 바지하다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선생 아들인 심흥기(沈鴻基)는 선친을 따라 다니며 배운 약초 댁분에 자기 집에서 한톨약국을 차려 인근의 명의로 소문이 자자하여 한때 성황 을 이루고 높은 인술로 인명구제는 、물론 인자한 성품으로 고향을 위하여 여생을 바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명종 9년(1554) 부평부사를 역임한 후 청백리로 우의정을 지낸 심수경(沈守뚫) 대감의 후손이며 근래 인천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심덕기 {沈德、基)와 숙질간으로 그 맏아들 섬홍기와 더붙어 한때 서꽂 지방의 인 물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 參꺼 文펴k : 3fuJÎI:;핏퍼!J史( 1或l*해勳處) 節2卷 150~ 151 벼1 X꾀\/;필퍼U史資料集(域l깡〈쐐勳樞) 쩌5i때 316~3221비 경기항일독립운동사(경기도사편찬위원회) 458~459떠i 참陽史(桂陽I쿄) 248~249떼 /힘川市史 1 (부천시사편찬위원회) 347 ~348폐 獨立까功취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卷 235떼 42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