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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천의 독립운동가 1) 섬 혁 성 (沈 鐵 誠) (1888. 8. 15-1958. 12. 14) 심혁성(沈懶誠) 선생은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 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평소에 손병희 선생과 교분을 갖고 있던 선 생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시 작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한 일합방에 대해서 평소 불만을 가지고 항상 조 선 독립을 희망하던 선생은 계양면에서도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3월 24일 오후 2시경 계양면 장기 리(場基里) 장터(일명 : 황어장터)에 모여든 군중들을 선도하며 태극기를 휘두르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시장에 나와 순시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선생이 체포된 후에 군중들은 그의 석 방을 요구하면서 거세게 일본 경찰에 항거하며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시위를 계속하려는 군증을 저지하려고 일본 경찰이 휘두르는 칼에 군중 속에서 시위하던 이은선(李股先)이라는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고 여 러 명이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일본경찰에 대항하 며 독립만세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이때 심혁성 선생이 주도했던 장기리 장터의 만세운동은 부천군 각 면 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며 우리의 독립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힘이 되 었다. 선생은 동년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직무 집행 방해죄로 징역 8월형을 언도 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1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 3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선생의 생활은 애국충정 그 일념뿐이었다. 선생은 30대 때인 5월 초순 황어장날에 장돌뱅이 행상들의 모든 물품을 달라는 대로 깎지도 않고 모두 사서 장터 한군데다 모아 놓고 “자아 돈 안 받고 거저 드릴 터이니 한가지씩만 마음대로 가져가시오”하고 소리쳤 다. 이렇게 장꾼들에게 나누어주기를 닷새에 한번씩 열리는 장날이면 꼭 II. 부천의 독립만세 운동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