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page

무소의 업무가 마비되는 등 혼란이 되자 부득이 인근의 집을 빌려 간신히 업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제(日팎)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때 불탄 서류들은 민적부(델싫總) . 과세 · 호수대장 · 주세(패렘) 수 지수입 수납부 · 연초판매 수시수입 수납부 · 묘지 사용료 원부철 · 역둔토 (뽑믿土 역의 경비를 충당하는 전답을 역토, 경비를 위하여 주둔하는 군 대가 경작하여 자급자족하는 땅을 둔전, 이 두 가지를 합쳐 역둔토라 함) 신고철 등이 있었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에 농민들의 불만 사항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시작 하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관습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특히 새로 만들어진 제도인 개별 묘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공동묘지를 이용하도록 한 조 치는 농민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 불만이었다 이와 같이 농민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국민들은 일제의 수탈정책과 탄압에 불만이 고조되고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하여 독립만세운동은 요원 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 參考文생X :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경기도사편찬위원회) 459-460떠l 4) 남동면(南洞面)의 만세운동 남동면 서창리(띤 昌많)에서는 3월 31 일에 송성용(宋및태) 등이 중심 이 되어 면민 전체를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이려고 계획하였다. 먼저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송윤중(宋潤中)의 집을 본부로 삼고 오창조 (吳昌組)가 주도하여 각 동리의 구장에게 다음과 같은 통지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4월 1일 질천시장(펜川市場)에서 전 면민이 집합하여 조선독럽만세를 제 창할 터이니 많이 참석하라’ 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통지서를 작성한 후 김춘곤(金春根) . 윤용택(尹容뿔) . 박중일 (*1、 꿇 . )과 협의한 후 각 리의 구장에게 돌리고 만세시위를 벌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일본경찰에 의해 발각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세운동을 계 획하던 사람은 모두가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 參考文없* : 獨立j핑!lVJ史資料集(國家報勳짧) 第51때 312-313面 II. 부천의 독립만세 운동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