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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역별 만세운동 1) 계양면(桂|場面)의 만세운동 1919년 당시 계양면민(桂陽面民) 가운데에는 천도교 신봉자 수 십 가구 가 있었다 이들은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孫乘熙) 선생과 항상 연락이 되 었으며, 그를 통해서 마음의 위로와 감화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손병 희 선생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계양변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을 하기 위하 여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워 통문을 작성하여 지구별로 배부하고 태극기 와 플래카드를 만드는 등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3월 24일을 기해 계양면 장기리(場基및) 장터(일명 : 황어장터)에서 만 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거사 시간은 장이 파하는 오후 2시경으로 정하여 주민들은 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면민이 모이는 기회를 이용하자 는 것이었다. 이들 대표들은 먼저 계양면 사무소를 방문하여 면장과 면서기에게 독립 만세 운동에 동조(同調)할 것을 당부하였으나 면장 등은 공무원임을 상기 시키면서 협조는 하되 행동은 하지 않고 묵인하는 정도로 양자가 합의를 보았다. 드디어 계획한 대로 3월 24일 오후 2시경 300명의 군중이 태극기 를 나누어 받고 ‘대한 독립 만세’ 라고 쓴 큰 기를 들고 섬혁성(沈懶誠)이 선두에 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 시위가 한창 진행될 무렵 이 지역을 경계하며 순찰하던 일본인 순사가 나타나 심혁성을 체포하여 면사무소로 끌고 가려 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일경을 향해 심혁성을 풀어 주도록 외치며 뒤쫓아갔으나 순사는 이에 응 하지 않고 주재소로 연행하려 하였다. 이때, 시위 군중에 같이 참여하였던 임성춘(林뿔春)은 시장에서 약을 팔 고 있는 사람으로서, 평소에 일본인 순사와 안면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단독으로 섬혁성의 석방을 위해서 교섭에 나섰고, 한편으로는 군중들에게 계속 시위할 것을 요구하였다. 200여명의 시위 군중들은 일본 경찰을 뒤쫓으며 “어서 그 사람을 놓아 라, 놓아라" 라고 소리치며 쫓아갔고 일부 성난 군중들은 “그 놈을 붙잡 아라. 붙잡아라" 라고 고함을 지르며 경찰을 에워 씨-자, 누군가가 경찰의 뒤통수를 내리치고 심혁성을 탈취하여 시장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당 3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