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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 확대를 도모하기 위한 운동을 표방하는 등 전면적 구조개혁론에 입각한 근대 민족국가 수립 노력들을 부단히 계속했던 것이다. 이후 시기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독립운동 양상은 이제는 제대로 연구되 어 있는 부분이 적지 않으나, 실제로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연구되어 있지 못 하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20년대는 국외에서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였고, 결국 창조파는 대부분 임시정부를 떠났다 반면에, 거의 독립적 단체인 군정부 산하에 있었던 여러 독립군 부대의 무장투쟁 성과들은 정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등으로 부각되어 나타났던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가 부상하면 서, 독립운동도 다양하게 분화되어 발전되어 갔다 이들을 묶어 하나의 역량 을 결집시키려 했던 운동이 바로 1926년에 일어난 민족유일당 운동인 신간회 (新幹會) 결성운동이었다. 하지만 민족운동가들 중에서 민족자치 같은 슬로건 을 내걸고 일제와 타협하려는 민족개량주의 노선이 이탈하여 결국 최남선(崔 南善), 이광수(李光洙) , 최린(崔離) 같은 인물들이 친일파로 전락해 간 시기이 기도 했다 1930년, 40년대는 1931년 만주사변(滿洲렇變), 1937년 중일전쟁(中 日 戰댈、)과 뒤이은 남경 함락, 1941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등으로 국제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다. 국외 독립운동은 그 중심이 만주와 상해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하 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국내 조직과 연결성은 거의 끊겨져 갔다 다만 일찍 이 1923년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폐j願퍼命효言)J 에서 선언한 대로 ‘민중 직접혁명론’에 바탕을 두고 테러를 중심 수단으로 하는 의열(義烈) 투쟁이 이 시기에 가장 활발했다는 것이 특정이다. 대표적인 무정부주의 운동단체인 의 열단 단원들의 다양한 투쟁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金 )L) 주석이 주도한 윤봉길(尹자판) 의사 의거, 이봉창(李한昌) 의사 의거도 각 각 바로 이 시기인 1931, 1932년에 일어났다 당시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대체 로 임시정부 계열인 우파연합 한국광복윤동단체연합회(韓댐光핑運動|빵|體聯合 샘)=광복전선(光따따微)과 반 임시정부 계열인 좌파연합(에j떼Eeb、戰微聯盟)의 2가지 노선에 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대체로 좌파연합은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 한국민족혁명딩,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이어지는 계열, 우파연합은 한 국독립당, 한국광복운동단체협의회, 한국독립당으로 이어지는 계열이라 할 수 있다 I 한.일합병과 독립운동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