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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학교 건설에 노력한 독립투사들도 적지 않았다. 국외에서는 의병운동의 지도자로서 만주로 망명한 유인석(柳購錫) ,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다가 연해 주로 망명하여 활동한 이상설(李相l힘)들은 각각 사거(死去)할 때까지 무장투 쟁을 위한 독립군 기지 마련과 민족 교육의 중심 지도자로서 진력하였다 대 종교단 계통으로는 서일(徐一) 윤세복(尹世復) 같은 분들의 노력이 유명하다. 특히 이상설은 일찍이 1906년 간도 용정(龍井)에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쳐 최초의 민족교육학교로 서전서숙(瑞힘휠짧)을 세웠을 뿐 아니라, 그가 1914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결성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J 와 1915년 북경에서 결성한 「신한혁명당(新韓옮命黨)J 은 사실상 1917년 초 이상설이 타 계하기 이전까지 중국 관내와 만주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일합병 전까지는 국내에서 농민이나 의병들의 무장투쟁보다 계몽운동에 투신했던 인사들도, 합병 전후 시기부터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 을 위하여 힘껏 노력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결 성된 단체 중에서 대표적인 경우가 1908년에 결성된 신민회(新民會)이다. 신 민회는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 三源뿔)에 신흥학교를 설립하였다. 바로 후일 대표적인 독립군 양성학교가 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J 이다. 이 러한 신민회에 소속하여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이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 는 양기탁(梁起繹) , 이동휘(李東輝) , 안창호(安昌浩) , 이동녕(李東寧), 김구(金 九), 이상룡(李相龍) , 이회영(李會榮) , 김동삼(金東三) 같은 분들이다. 우리나라 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이다. 우리 민족은 1919년 3 . 1운동 이전 단계까지 일본군과 헌병경찰에 의한 민 간통치로 대표되는 무단정치(武斷政治)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의 수탈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궁핍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 때문에 농민과 의병의 20여년(1894-1915)에 걸친 일본 정규 군과의 무장투쟁 이후 곧바로 조선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흘린 피의 역사 때문에 3 . 1운동이라는 전민족적 운동의 폭발이 가능했다. 이를 기념하는 역사책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2대 대통령이신 박은식(朴股植) 선생이 당시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 聞)dl 편집인이자 자료 담당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쓰신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dl 이 다. 1919년 3 . 1운동은 이전의 무장투쟁이나 계몽운동의 맥을 모두 잇고 있지 28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