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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농촌과 도시 지역으로 숨어 들어간 의병 운동의 직 · 간접 참여자들은 당연히 1919년 3.1운동에도 적극 동참하 였다. 1913년 채기중(蔡基中) 등이 경상도 풍기(豊基)에서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준비하기 위한 비밀결사조직인 「대한광복단(大핸光復團)J 을 결성한 데서 출발 하여, 1915년 이후 박상진(朴尙鎭) 등의 지도로 군대식 조직으로 재편성된 「 대한광복회(大點光復曾L 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 치를 지닌다. 1918년 조직이 발각되기 전까지, 독립군 조직 건설과 친일파 처 단을 위하여 자본주의 방식을 써서 광산을 개발하고 미곡상(米뤘댐)을 경영하 여 군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국 내와 국외를 잇는 연결거점으 로 삼았다. 동시에 후일 일본군 과의 전투에 진력한 독립투사 들인 노백 린(盧伯織) 등을 상해 로, 김 좌진(金住鎭) 등을 만주 로 파견하여 독립군 근거지를 마련하였으며, 의병 계열 독립 운동가를 밀고한 장승원(張承 遠) 같은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전의 의병투쟁 .~ -" . ‘ , .... ‘ 시ζ월'"션 강‘ -’‘ 1 ‘ 1 “ . "’ ‘" . ’ .. 각 ’으환혈폈↓? >, ‘ * 이나 비밀결사 투쟁과는 성격이 재미 광목군(맹호군) 전혀 다른 다음 단계 운동으로서, 보다 본격적이고 근대적인 방식의 독립운동 이었다. 이러한 선구적 형태를 본받았으면서도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비밀결 사들과 그 조직원들은 당연히 1919년 3.1 만세운동에도 적극 활동하였다. 이밖에 이 시기의 국내의 독립운동으로는, 일제의 문화적 동화운동에 저항 하는 공개적이거나 비공개적인 교육문화운동이 있었다. 또한 아직 제대로 부 각되고 있지 않지만 노동자, 농민들의 식민지 경제수탈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 운동들이 있는데,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의 건설, 노동야학(勞動夜댈) , 노동쟁의 방식의 운동, 농민들의 토지조사사업 반대 투쟁, 농민야학(많民夜學) 방식의 운동이 기본적이었다. 이들의 기본 조직 역시 1919년 3 . 1 만세운동에서 적 극 활동하였다. 한편 1910년 전후 만주와 연해주(治海州)에서는 독립군 기지와 군사 훈련을 I . 한.일합병과 독립운동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