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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운동이 바로 1894년 농민전쟁이었다. 당시 농민혁명론의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던 일반 백성의 힘을 1894년 들어 선 친일파 정부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지식인 후쿠자와 유키 치(福澤論띔) 식의 개혁을 모델로 일본군과 일본 차관에 의존하는 개혁 방식 을 채택하였다. 그래서 부르주아 국가체제 건설을 위한 최초의 본격적인 개혁 이라는 성격을 가진 갑오개혁(甲午改꿇)을 내세우기도 했고 통리기무아문(統 理機務倚門)으로 대표되는 개혁담당 기구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개혁 전반부에서는 일본식 의복제도 도입을 전제로 하는 단발령(斷髮令)을 내리고 일본과의 경제 통합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는 등, 사실상의 일본 보호국으로 전락해 가는 정책들을 펌으로써 근대적 개혁 방향 자체에 대한 일반 국민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895년 명성왕후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 직후 시작된 의병(義兵) 운동은, 1904년 제1차 한일협 약과 다음 해의 을사보호조약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계기로 단계적으로 더욱 강화되어 가는 강력한 항일 독립운동을 폈다. 특히 1907년 해산된 정규 군인들이 참전하면서부터는 의병투쟁의 양상에서 독립전쟁의 양상으로까지 진전되었다. 그러나 1909년 가을 전후 시기부터 이 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펴는 등 일본 정규군의 강력한 진압작전으로 해서 1915년 채응언(蔡應彦) 등이 지도한 황해도의 천마산대(天摩山隊) 활동 등을 마지막으로 거의 종식되었다. 한반도에서 더 이상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 한 의병부대들은 의병장 유인석(柳購錫) , 이강년(李康季) , 홍범도(洪範圖) 등을 필두로 만주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서 보다 근대적 군대 훈련에 바탕한 정규 군의 성격을 띤 독립군으로 재편성하면서 독립전쟁을 준비해 갔다. 이렇게 전개된 항일 의병운동은 유학을 공부한 학자들 중에서 백성의 올바 른 욕구를 제대로 개선하자는 보수적인 데서부터 시작하여 문제되는 사회구 조 개혁 내지 국가체제까지 혁신적으로 뜯어고쳐야 백성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운동을 폈던 유교적 지식인들에 이르는 다양한 노선의 운동을 계승한 자주적 독립운통이기도 했다. 한편 대한제국(大韓帝國) 말기에는 서구적 근대 부르주아 문화의 빠른 수입 을 통하여 독립된 근대 부르주아 국민국가 수립을 주장했던 새로운 지식인 그룹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직접 투쟁인 무장투쟁 노선에 비판적이었다. 반면에 , 부르주아적 국민 계몽운동을 통한 근대 교육과 근대 산업의 진흥, 이를 통한 근대 국민국가적 투쟁 세력의 저변확대 노력을 2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