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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수(李來修), 김병기(金炳표) , 이겸용(李課容) , 이설후(李雪따l), 신태련(申泰·練) , 신형철(申瑩澈) , 오세덕(吳|止惠) , 정규식(鄭奎植) , 김홍진(金弘鎭) , 염광록(嚴光淑) . ※ 몬 선언서는 1919년 11 월에 의친왕을 위시한 민족대표 33명이 선포한 선언서이다. 내용은 황제의 실수로 백성이 참혹한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참회의 정이 내포되어 있다. 31) 청 산리 전투 군가 (1920년) 1919년 8월부터 의병장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및 국민회군이 국경을 넘 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버리고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에서도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고 같은 해 10월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 서군과 홍범도 지휘의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 2천 여 명이 일본군 5천여 명을 두만강 상류 화룡현 일대에서 크게 무찔렀다. 만주 간도지방의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혼춘(彈春) 사건을 조작하여 출병의 구실을 얻어 병력을 투입하여 독립군 은 백두산 부근 화룡현 일대의 밀림지대로 집결했다. 청산리전투는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침입한 일본군 이즈마지대(東支 隊)를 백운평 계곡에서 섬멸한 것을 시작으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국민 군 연합군이 완루구, 어량촌, 천수평, 봉밀구, 고동하 등 일이도구(一二道 構) 밀림지대에서 10여 차례 벌인 전투를 말한다 어랑촌 전투가 가장 치 열했는데 일본군은 2배의 병력에 월등한 화력으로 1천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일본군 2-3천명의 사상자를 낸 청산리 전투는 6일간 지 속됐는데 독립군의 굳건한 항전의지와 현지 한인주민의 헌신적 지원, 자 발적인 정보제공 및 통신연락에서 기인했다. 청산리 전투에서의 군가 1 .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들을, 삼천리 강산에 열혈이 끓어 문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2. 백두의 찬바람은 불어 거칠고 암록강 얼음 위맨 은월이 밝아 고국에 W 독립관련 문헌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