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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文歡 : 判決文0919. 4. 19. 大邱地方法院 휩珍支廳)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634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卷 376面 54) 한 영 규(韓 榮 圭) (1882. 9. 7 ~ 1954. 1. 10) 한영규(韓榮圭) 선생은 경기도 용인군(龍仁 君ß) 내사면(內四面) 남독리(南유里) 사람이다. 1919년 당시 37세의 천주교 신자이 던 선생은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동하였다. 선생은 3 . 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서 군내의 각 면 · 리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전 개되자 이에 적극 호응하여 동리의 밤나무골에 서 김운식(金될植)과 함께 주동이 되어 독립만 세 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선생은 1919년 3월 29일 동리 주민 100여명을 규합하여 이들을 이끌고 본인 소유의 구 한국 태극기를 높이 들고 내사면에서 양지리(陽智里)까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 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용인군의 만세시위는 3월 28, 29 양일에 치열하였는데 특히 3월 28일은 금량 장날로 동리 사람은 물론 각지에서 모인 장꾼들이 가답한 대규모 시 위였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웹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 역 10월형을 언도 받았고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1 년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 였다. 부천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정말다(鄭末多)가 있다. @ 參考文敵 : 判決文(1919. 5. 13 京城地方法院) 判決文(1919. 7. 5 京城覆審法院) 判決文(1919. 8. 21 高等法院) 178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