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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최 효 대 (崔 孝 大) (1892. 12. 28 - 1952. 2. 15) 최효대(崔孝大) 선생은 강원도 울진(節珍) 사람이다. 강원도(당시)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節珍那 遠南h퍼 梅花1f)는 3 .1운동 당시에는 6일과 11 일이 장날이었다. 그리고 신문화의 영향도 일찍이 받아 만흥학교(H免興學校)를 설치하여 지방청년에게 새로운 사상을 보급시키던 곳이니 시골로서는 비교적 개명한 곳이었다. 매화리에서 북쪽 약 20리 거리에 선유굴(仙遊첼)이 있는데 여기는 구한 말 의병을 일제 군대가 생매장하였던 곳으로 민족을 분격케 하는 이야기 가 있었던 곳이었고 신돌석(태칠石)의 의병부대가 활약하던 곳이어서 항 일운동의 기초가 다져진 마을이었다. 그러나 3.1운동에 대한 소식은 서 울과의 소식이 불편하였던 곳이어서 때늦게 그 소식을 들었다. 매화리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매회리의 장날인 4월 11일이였는 데, 이날의 만세운동을 추진한 사람은 매화리(梅花벌) , 금매리(金梅멀) 등 지의 청년들로서 대개 만흥학교 출신이었다. 매화리와 금매리의 청년들은 윤호규(尹鎬達)를 중심으로 남광호(南光 鎬) . 최현탁(崔鉉멜) . 윤병관(尹炳寬) . 최중모(崔重模) 등이 선봉으로 활 약하였으며, 고목리 청년 전병겸(田炳課) . 남병표(南炳約) 그리고 고성리 의 청년 주진휴(朱鎭休)들과도 연락이 있어서 4월 10일 밤에는 그곳 진산 격인 남수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았다 일제에 의하면 이때 8명의 청년이 올라갔던 것으로 되어있으며 이때 주 동 인물 일부가 검거되어 일제의 감시도 더욱 삼엄하여 졌다. 그러나 이곳 장날인 4월 11일 최효대(崔孝大) 선생은 100여명의 시위 군중들과 장군들이 합세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 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해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부천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최석중(崔錫重) , 손부(孫歸) 남분 론(南紹論) , 증손(曾孫) 세열(世烈) . 승열(昇烈) . 상열(尙烈) . 인열(寅烈)과 고손녀(高孫女) 혜정(惠靖)이 있다.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