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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인식 선생과 김필선 · 김재구 · 김규용 · 김계호(金햄鎬) 등은 나머지 인쇄물을 가지고 거마리(車馬里)의 이종태 집으로 본거지를 옮겨 서 밤새도록 준비하였다. 그리고 임천리에서도 최항식(崔元植)등이 있어서 준비는 계속되었고, 마을마다 책임자가 있었기 때문에 다음날 거사준비에 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드디어 이튿날 아침 이종태(李鐘台)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오 전 11시경 양양읍 시장에 이르러 최인식 선생은 군중들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선창하면서 행진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선생은 그해 5월 31 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을 언도 받자, 법정에서 의자를 던지면서 판결에 대한 부당함을 항의하자 법정모욕죄가 가산되었고, 또한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독방 에 감금되기도 하는 등 실지로는 3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 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최영길(崔榮吉) 손부(孫揮) 정화숙 (鄭和淑), 증손(曾孫) 선아(善媒) . 선혜(善慧)가 있다. @ 參考文敵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611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974.975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卷 63面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