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page

의 건의안은 <청년조선건설>에 대한 중요한 지위와 사명에 관하여 사회 의 여론을 환기하고 청년 단체의 분발을 요망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2년 동안이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주간은 물론 야간강연회를 개최하면서 독립사상과 배일정신을 청년들에게 고취(較吹)하였다. 1922년 10월 22일 재외 조선인 노동상황조사회 창립총회가 서울 서대문 민우회(힘友會)에서 개최되어 신생활사 · 무산자 동맹회 · 청년연합회 · 교 육협회 등 15개 각 사회 단체가 회합하였는데 선생은 이 회의에서 위원으 로 선출되었다. 또한 1923년 2월 3일 조선 물산장려회에서 첫번으로 열리는 강연회가 천도교당에서 열렸는데 이때 2천여 명의 청중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 었으며, 이때 선생은 이갑성(李甲成) . 이돈화(李훨化) . 오화영(吳펀윗) 등 과 연사가 되어 연설함으로써 청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조선 청년연합회에서는 물산장려를 위한 지방순회 강연단을 조직하고 북한지역 일대를 순방하였는데 당시 연사로는 선생을 비롯하여 신태악(辛 泰歡) . 배동수(裵東洙) 등이 활약 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의 주된 정신은 국산제품의 애용으로 민족기업을 육성시켜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는 것이었으며 전국 규모를 갖는 조직으로 참 여한 160여명의 발기인은 사회의 각개 각층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들이었다. 선생은 1923년 8월에 함남도민대회 집행위원이 되어, 그 대회에서 생의 충동<生의衝動>이란 제목으로써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3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함남도민대회(成南道民大會)야말로 민족 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고 극찬하였다. 1925년부터 조선청년연합회(朝應휩年聯合會)의 상무위원 및 함남도민회 집행위원, 전조선노동총동맹 창립준비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활동하다가 다시 검거되어, 1929년 2월 11 일 일제의 비인도적인 고문과 옥고로 인한 신병으로 보석치료(保釋治擔) 중 38세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 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子) 최수정(崔洙植) , 자부(子歸) 방옥 순(方玉順)이 있다. @ 參考文處k : 펌찮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91面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