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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최 순 택 (崔 淳 繹) (1892. 10. 11 - 1926. 2. 11) 최순택(崔淳繹) 선생은 1892년 함경남도 함흥 시(成興市) 하서리(倚西里)에서 통천 최씨(崔民) 최능진(崔能鎭)의 장남(長男)으로 출생하였다. 선생은 1918년 연희전문학교(延禮專門學校) 재학 중 함경도 출신으로 서울에 유학하고 있는 각 전문학교(專門學校) . 대학교(大學校)에 학적 을 두고 있는 학우(學友)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 하여 상부상조(相技相助)하며 국권회복(國權回 復)의 날을 기다리며, 앞으로 있을 민족봉기의 전위적 역할을 하고자 김 재련(金載練) . 김국한(金國輪) 등과 함께 재경 함산학우회(在京 l或山學友 會)를 조직하여 은밀히 조국광복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28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받고, 함흥에서 시 위를 구체적으로 계획하여 3월 3일 함남중학교 · 함흥농업학교 · 영생중학 교 등의 3, 4학년 학생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同) 계획과는 관련없이 군중이 산발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3백 여명이 피체되었고, 이에 일제는 3월 3일 새벽 함흥 관내에 예비검속을 단행하여 함산학우회 간부들은 대다숫가 피체되었다. 이때 피신한 선생은 함흥에서 박상보(朴相南)와 함께 전국의 만세시위 운동을 알리고자 독립신문을 신창리 주배희(朱培熺)의 집에서 등사하여 함흥 시내 각처에 은밀히 뿌렸다. 선생은 이 <독립신문> 배포의 책임을 맡았으며 이로 인하여 일경의 감 시를 피하여 다니다가 피체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9월 17일 만기 출옥한 선생은 1921년 4월 신흥우(~크興雨) . 장덕 수(張德秀) . 송진우(宋鎭宇) . 최팔용(崔八鋼) 제씨와 조선교육조사위원회 (朝蘇敎育調효委員會)의 발기인이 되어 조선민족의 진가를 발휘하여 인류 공존의 대의를 극복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각종 교육사업에 관한 실태를 조사하였다. 선생은 1922년 2월 국내 각 지방의 대표자들이 모인 조선청년회연합회 (朝蘇춤年會聯合會)에서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며 4월 6일 제3회 총회 170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