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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 . 이 만봉(李萬奉) u1 ^ 유태응(劉泰應) . 전철백(全微伯) . 주병봉(朱炳 鳳) . 김홍식(金鴻植) 등 학생 청년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예정한대로 4월 23일에는 이만봉 · 김병호(金炳鎬) 등이 서대 문 방향에서, 경신고 생도 우강열(禹康烈) 등은 동대문 방향, 일부 청년들 은 남대문 또는 창덕궁에서 ‘국민대회’ ‘공화만세’ ‘조선독립’이라고 쓴 기 를 휘날리며 길가 시민들에게 취지서 · 선포문 등 인쇄물을 배포하면서 행 진하였다. 또한 유태웅 · 박수봉 등은 종로 보신각 앞에 모인 군중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을 때 대표자들은 봉춘관으로 모이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예정한대로 전옥결 · 이철 등과 같이 미리 준비했던 <국민 대회 > 간판을 가져다가 일경의 삼엄한 감시 하에서도 대표자들이 모이는 봉춘관에 무사히 달았다. 그리고 선생은 시위 군중들에게 선포문(宣布文) 과 취지서 등을 배포하면서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다가 일경 에 피체되었다. 선생은 그 해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1920년 3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 역 2년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에도 1924년 4월 1 일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위원회에서 전북지 방 시찰원으로, 동월 21일에는 노농(勞農)총동맹 집행위원 및 전형위원으 로, 동년 12월 8일에는 사회주의자동맹 창립회의에서 집행위원으로, 1925 년 3월26일에는 노총간담회 집행위원으로 1926년 4월 22일에는 조선사회 단체 중앙협의회 창립준비위원에 각각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 였다. 부천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子) 장성환(張星煥) , 자부(子눴) 이순 예(李順禮) , 손(孫) 장기봉(張基鳳) . 장기미(張甚美) , 손부(孫힘) 윤현숙(尹 賢淑) 증손(曾孫) 향현(香鉉)이 있다. @ 參考文생k : 쐐JLi띄퍼1;史 ( 1꿇1家해勳處) 第4싫 141-1461예 ðY.JÜ立i떨퍼1;史 (댈|2했報勳處) 청8卷 391í륨l ,aij立i필퍼1;史 (隊I*~뻐勳週) 껏9싫 174-17' 182-185.206-2071때 獨立댄폐史 (國|家報勳處) m10,쌀 107面 ’hurtLj댄페j史資料 찢(햄l家報勳處) 節5때 58-82 . 131 - 155때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