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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구체적 조직작업을 펼쳐나갔다. 3월 4일 오전에 배재고보 기숙사에서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와 장채극 선생과 전옥결 · 강우열 등 중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연석회의를 열고 투쟁 계획을 협의한 끝에 3월 5일 제2차 만세시위운동의 최고 지도자로서 강기 덕과 김원벽을 추대키로 결정하는 등 계획 단계에서부터 적극 참여하였 다. 그리하여 3월 5일 학생 주도하에 행하여진 만세시위운동은 평양에서 온 학생들까지 합세하면서 남대문에 이르러는 수많은 군중이 쉴새없이 만 세를 부르면서 연도를 메웠다. 이때 학생단 시위에 참여하였던 군중은 당 시 일제측에서는 4-5천명으로 추산 보도하였으나 실제 참여한 인원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또 장채극 선생은 국민대회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적극 참여 활 동하였다.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1919년 4월 23일을 임시정부수립 선포일 로 정하였다. 현석칠 · 민강 등은 국민대회 취지서 · 결의문 · 약법 · 선포문 등을 비밀리에 인쇄하기 위하여 서소문동 이민홍(李敏洪)의 집 홍제당(洪 濟堂)에서 조각공(影刻工)이 목판을 새겨 약 6.000장을 인쇄하였다. 장채극 선생은 전에 이춘균(李春均)(명치 대학생)에게서 받아 두었던 < 임시정부선동문> 과 임시정부령 제 1호 제 2호를 간동 우태정(禹泰鼎)의 집에서 윤좌진(尹住珍) . 전옥결(全玉됐) . 김종하(金種夏) . 나종하(羅鍾河) 등과 함께 등사기로 약 1500부씩 증쇄(增빼)하였다. 각기 맡은 대로 준비하여 4월 23일의 대회는 아래와 같이 진행하기로 하였다. 1) 자동차 3대에 각각 ‘국민대회’ ‘공화국 만세’ 라고 쓴 기를 달고 동대 문 · 서대문 · 남대문으로부터 종로 쪽으로 행진하면서 인쇄물을 배포 하고 정오를 기하여 종로 보신각 앞으로 집합한다. 2) 이와 함께 청장년 약 3천명을 종로 보신각 앞으로 배치하고 정오를 기해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전개한다. 3) 이와 때를 같이하여 13도 대표자들은 서린동(瑞職洞) 봉춘관(奉春館) 에 모여 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하고 집 앞에는 <국민대회> 간판을 건 다 는 등 3개 방면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유인(金給寅)과 함께 일선 활동을 담당한 보성고보 생도였던 장채극선생과 전옥결 · 이철 등이 앞장서서 최상덕(崔上德) . 박수봉(朴壽 162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