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page

41) 장 기 문(張 基 文) (1924. 10. 17 - 1994. 1l. 9) 장기문(張基文) 선생은 전남 곡성군(삼城那) 석 곡면(石삼面) 봉전리鳳田里) 사람이다. 선생은 1943년 10월 중순 일제에게 강제로 징 집 당하여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지구(安둠地 區)에 주둔하는 일본군 3541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중, 일본군 병사로부터 중국 중경(重慶)에 대한민 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와 광복군이 있 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 종군중(從軍中)이던 한적 사병(韓籍士兵)들이 많이 탈출하던 호남성 서부지역(湖南省 西部地域:長沙 附近)에서 1944년 12월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제4방면 슬하부대(第4 方面 隊下部隊)에 망명하였다. 그 후 여러 경로를 거쳐 토교(土橋) 남쪽 유가만(有家灣) 소재 중국군 남천집중영(南果集中營)에 집결 수용되었다가 1945년 4월에 박종길(朴鐘 吉) . 황의선(黃義善) . 정건수(丁建壽) . 강재식(姜在植) 등 32명이 일진(一 陣)으로 토교(土橋)에 도착하여 광북군 토교대[토교대(土橋隊) : 대장 한 성도(韓聖道) , 대원 장기문(張基文) 외 34명)]에 입대하고, 광복군 총사령 부 경위대(光復軍總司令部 푼情隊)에 배속된 뒤, 수 차례에 걸쳐 동지들과 함께 특수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특수임무란 광복군 정예대원에게 필요 한 교육훈련을 실시한 후 국내에 투입하여 적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지 하군을 조직하여 정보활동을 하다가 미군 상륙부대와 협력하여 본토(대한 민국)를 수복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20일 광복군을 서울 에 진입시켜 수도 서울을 탈환하겠다는 임시정부의 이와 같은 엄청난 계 획은 작전개시일 5일을 남겨놓고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그 계획 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후 선생은 경찰에 투신하여 민주일선에서 애국심을 불태우다 퇴임하고 고향인 석곡면 봉전리에서 이장(里長)직을 다년간 수행하면서 국민의 봉사자로서 청렴결백함을 인정받아 곡성군 석 독면 면의원(面議員)에 당당히 당선되어 고향의 면(面) 살림꾼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