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page

3) 국외 망명 생 활과 광복운동 이른바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선생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켰을 뿐 아니라 가족에 대한 감시도 극심하였다. 이에 선생은 국외 망명을 결심하고 극비리에 가족을 서울(영등포)로 옮긴 후 1943년 2월 중 국[만주(뼈洲) 봉천성(추天省) 소가둔(歐家면) ]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지 하활동중인 동지들과 더불어 광복운동을 도모하였다. 그후 선생은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옥중생활에서 얻은 신병(폐결핵)으로 인하여 1945년 4월 부득이 치료차 일시 귀국 체경(뿜京)중에 민족의 숙원인 조국광복을 맞이 하게 되었다 8. 15 광복 이후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자면 무엇보다 교육을 우 선해야 하고, 민족의 주체의식을 함양하려면 민족사인 한국사를 일깨워야 한다고 여긴 선생은 평소에 선념을 갖고 연구한 한국사를 전공과목으로 교육에 종사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경성공업학교를 위시하 여 선린상업학교 · 배재중고등학교 · 경신중고등학교에서 1962년 6월 정년 퇴직할 때까지 오로지 조국광복과 인재양성에 헌신하다가 1965년 1월 1 일 65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었다.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子) 이난용(李蘭짧) 이 있다. @ 參考文법X : 朝따ðY1Jj'.{ ;핏폐](金 TEI꺼 짜힘. 原흙l콩 . 1967) 節 I 싫 分JlU. 502-504 |且| 金相玉 烈土의 抗 日 l훨댈합記(同記念훤業뺨) 65-68떼 日 팎慢뼈下함國36年史(國史偏꿇委員쉽) 第5살 768--769面 獨立連폐j史資料集( I司編흉委員曾) 第9n합 1984 . 1035떠i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4쌀. 8310떼 껴:~QB 해092l. 5. 20, 6. 25, 9. 1, 9. 19, 10. 1, 10. 26字) 꽤立댄꾀史(國家해勳處) 1,030떼 쭈減仁 선생의 7 쭈|삶j鎔씨 의 ;효 둡‘펀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