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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청원서 등을 인쇄하였으며 또한 비밀유지를 위하여 인근 중부면 단 대리(처台里)의 안효동(安孝童) 집으로 옮겨가면서 각각 3천매씩을 인쇄 하였다. 그러나 동년 9월 동지 김기한을 위시하여 이섬 · 홍영전 등이 왜경에게 체포되고, 마침내 인쇄의 기밀이 탄로되어 동년 10월 선생 역시 김교상 · 강학희 등과 함께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대에게 검거됨으로써 40여일 동 안 모진 고문을 당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선생의 처인 류구순(柳九順)도 취조중에 기절하여 품에 안고 있던 장녀(당1세)를 바닥에 떨어뜨려 즉사 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0년 12월 24일 경성지방 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고 이듬해 1921년 5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실형 1년을 선고(大正 8年 fÞ~令 第7號 違反) 받았으며, 끝내 서 대문 형무 소(유년감방 제7호실)에서 형량대로 옥고를 치렀다. 2) 구국 계몽운동과 항열투쟁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선생은 대한독립단과 암살단과의 관계를 지속하 면서 일제에게 대항할 수 있는 항일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함양하기 위하 여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로 작심하였다. 이에 선생은 1922년 5월 광주 군 언주변 염곡리(廳감里)에 소재한 명신의숙(明新義짧)을 인수하여 청소 년의 계도에 나섰으며 또한 1923년 1월 언주변 신사리에 있는 선사강습 소(新沙講習所)를 인계받아 계몽운동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러나 이때 김상옥 열사의 종로경찰서 투탄사건(投彈事件)이 일어나자 선생은 암살단과의 관련혐의로 종로경찰서 · 광주경찰서 · 언주변주재소 등 에 연행되어 20여일 동안 심한 악형을 당하였다 이렇듯 모진 고초를 겸 으면서도 선생은 1923년 3월 고향인 정담리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광청 강습회[(廣淸講習會) : 청담강습소(淸澤講習所) , 현 언북초등학교의 전신)] 를 개설하고 주야 10여년 동안 인근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진력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선생으로 하여금 1933년 4월 「청담강습소」에 서의 사직을 강요하는 동시에 모든 대외활동을 금지케 하였다. 그러나 선 생은 종로 중앙기독교 YMCA 농촌부의 협조하에 농촌생활향상을 도모하 였고 생활합리화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외 망명지사들과도 접촉을 꾀 하면서 10여년간 항일투쟁을 지하운동으로 심화하였다. 15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