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page

39) 이 재 언 (李 載 仁) (1900. 9. 26 - 1964. 12. 3) 호(號) : 일 광(一光) 이재인(李載仁) 선생은 1900년 9월 26일 경기 도 광주군(廣州那) 언주면(彦州面) 청 담리 (淸澤 里) 291번지, 현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에서 이화응(李華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던 선생은 1916년 경 성공업전문학교 부설 공업전습소와 1917년 경성 국어보급학관을 거쳐 1918년 중앙기독교YMCA 영어과에 입학하였으나 3 . 1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학비조달이 여의치 못하여 중퇴하였다. 1) 대한독립단 업단과 암살단과의 독립운동 3 . 1운동 다음해 1920년 3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滿洲奉天省柳河縣 三源뽑에서 결성, 도총재 朴長浩)에 입단한 선생은 동단 사한장 김기한(司 輪長 金起漢)의 지휘하에 동지 김교상(金敎爽) . 이섬(李運) . 홍영전(洪永 傳) . 강학희(姜學熙) . 한진교(韓震敎) 등과 공모하여 동단 경기도지단의 조직을 계획하고, 동년 4월부터 선생의 자택(청담리)에 활판인쇄기를 설치 하여, 동단 중앙본부의 명의로 동단의 취지서 · 서약서 · 경고문 · 동단 지 방군(君ß)시행규령 • 동단 경무국시행규령 등을 인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누설될까 우려한 선생은 동년 7월 하순경 인쇄장소를 자택에서 광 주군 중부면 탄리(中部面 벚里) 산속에 있는 봉국사(奉國츄)로 옮긴 후 인쇄작업을 계속하였다. 한편 이때 북로군정서[(北路軍政暑) ,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에서 결 성한 대한군정서(大韓軍政暑)의 후신, 총재 : 서일(徐一) , 총사령관 : 김좌 진(金佑鎭)]의 집법과장 최우송(執法課長 崔友松)의 지시로 군자금을 모 금, 조달하고자 국내로 잠입한 김동순(金東淳) , 그리고 국내의 김화룡(金 華龍) 등과 더 불어 1920년 5월 암살단(暗殺團)을 조직 한 김 상옥(金相玉)으 로부터 조만식(曺B免植)과 김교상을 통해 인쇄를 의뢰 받은 선생은 동년 8 월 중순 암살단의 취지서 · 서약서 · 경고문 · 포고서 등을 비롯하여 당시 미의원시찰단(美議員視察團)의 내한(8. 24-9. 2)을 계기로 그들에게 보낼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