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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하여 그날에 있었던 투쟁모의(關爭說議)와 상황에 대해서 일제 경찰에 서 신문(訊問)을 받을 때 모두 묵비권(默秘權)을 행사한다는 확약을 하고 밤 9시경에 해산하였다. 부산학생항쟁(쏠山學生抗爭)은 민족흔(民族塊)의 발로로서, 일제의 철저 한 보도관제 속에서도 일제의 침략출구이던 부산과 주변 지방의 각개각층 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당일에 일경과 일본 헌병들은 부산제2상업학교(옳山第二商業學校)와 동 래중(東泰中)의 학생 약2백 명을 체포하여 야만적인 고문을 자행하였고 오랜 취조 끝에 주모자로 지목된 15명의 학생을 송국(送局)하였다. 이때 선생은 홍병희(洪秉훌) . 이인희(李仁熙) 등 부산2상(옳山二商) 학 생 6명 그리고 동래중학생 9명과 함께 주모자로 체포되어 1941년 6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형이 확정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학교 에서는 퇴학을 당하였다. 1940년의 부산학생항쟁(쏠山學生抗爭)은 일제에 대한 가장 어려운 환경 에서의 용감한 투쟁이었으며, 일제의 탄압에 짓눌리고 좌절되어 가고있던 민족혼을 충격적으로 경각시켰다는 점에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 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 다 부천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子) 이혜숙(李惠淑)이 있다. @ 參考文敵 : 身分l帳指救照會回報書 日 帝f룻略下韓國36年史(國史編幕委員會) 第12卷 556面 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263面 쏠山市史(쏠山市史編흉쫓員會, 1974. 2. 27) 1099-1105面 抗 日 學生民族댄動史%究(鄭 l브鉉, 1975. 9. 2이 488-492面 옳 慶南 3 . 1連動史(3 . 1同志헬, 1979. 9. 1이 84-89 . 174-175面 學籍쩍(5ri:山第二商業學校) 獨立運1IJ)j史(國家報勳處) 第9卷720 -727때 젠 日 初報(1940. 11.24, 1l.25) 껴i亞 日 報(1940. 12. 28) 獨立有功者功勳錄(園l家報勳處) 第11卷 211떼 150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