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page

요청으로 참열(參列)하였다. 폐회식 때에 산택(山澤) 경남도지사는 치사 (致爾,)에서 “제군(謂캠)들은 정정당당히 싸웠다” 그리고 심판장인 내태(乃 台)는 “심판은 신성하고 절대 불가침(不可훔’)이다”라고 하며 한국학생들의 항의를 일축(-澈)하고 일인(日人) 학교인 부산중학(쏠山中學)을 1위로 발 표하고 우승기를 수여하였다. 식순(式順)의 마지막에 일본국기(日本國雄) 가 내려오자 한국학생들은 드디어 본격적인 민족정기(民族正氣)의 발화가 시작되었다 양교(兩校) 학생들은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금지되어있던 ‘황성 옛터’ ‘아리랑’ ‘양산도’ ‘도라지 타령’ ‘쾌지나 칭칭 나네’ 등을 부르며 일 인에게 투석하고 평소에 악질로 소문난 일본인 교사를 구타하는 행동으로 발전하여, 운동장은 항일(抗日)의 광장으로 변하였다. 일본관헌들은 칼을 빼어들고 저지하려하다가 겁에 질려 방관하는 태도였으며, 기세 당당하던 심판장 내태(乃台) 대좌(大佑)는 한국학생들의 분격하는 혼란을 틈타 비 겁하게도 운동장 뒷담을 뛰어넘어 도주하였다. 분노한 양교(兩校) 학생들은 일제식으로 집총 무장하고, 한국의 민요를 부르며 반일제(反日팎) 시위를 벌이며 가두행진을 하면서 ‘조선독립 만세’ ‘일본 놈 죽여라’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무엇이 동아의 맹주냐’ 등 의 구호를 절규하면서 시위하자 포악하던 일본 군경도 손을 쓰지 못하였 다 양교(兩校)의 가두투쟁 대열이 부용동(英흉洞)의 겁정다리를 지나 보수 통(寶水洞) 네거리에 당도하자, 양교(兩校) 학생들은 항쟁 효과를 더욱 확 대시키기 위하여 부산2상(쏠山二商)은 대청동(大廳、洞) 거리로 해서 중앙 통(中央洞)으로 진출하고 동래중학(멋泰中學)은 광복동(光復洞) 거리를 거쳐 중앙동(中央洞)으로 행진하여 재집결한 후, 내태(乃台) 관사(官舍)를 습격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제2단계 투쟁에서 하급생들의 희생을 예방하 기 위하여 1, 2, 3학년생들은 모두 귀가시켰다. 분격에 넘치는 모습으로 거리를 누비며 항일기세(抗日氣勢)를 높이 거 양(짧揚)한 양교생 4.5학년 400여명의 학생은 중앙동 부산일보 뒷편에 있던 표재목점 (11表材木店) 앞에 모인 후, 오후 8시경 대열을 정비하여 내태 (乃台) 관사(官舍)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내태(乃台) 대좌(大住)는 이 미 도망하여 잡지 못하고, 그의 처(쫓)를 잡아 추궁하였으나 확보(確報)를 얻지 못했다. 양교(兩校) 학생(學生)들은 내태(乃台) 관사(官舍) 습격을 비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