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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밤 송재만 등은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고 4월 4일 9시경에 대 호지 면사무소 앞 광장에는 독립운동 추진위원 행동대원 등 주민 약 600 여명이 모여 역사적인 대호지 만세운동의 막이 열렸다. 30척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달아 광장 한가운데 세우고, 면장 이인정(李 寅正)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南柱元)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한운석 (韓雲錫)이 작사한 애국가를 제창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 쳤다 식이 끝나고 이어서 선생은 원로 이인정(李寅正)과 행동총책 송재만 을 선두로 하여 행동대원과 독립운동추진위원은 군중들과 대오를 정비하 며 비폭력, 평화적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대한독립만세와 애국가를 외치며 천의(天宜)시장 광장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마침 천의 장날이어서 장꾼 까지 모여 시위 군중 총 인원수는 1.0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시위 군 중들이 천의시장에서 식사하며 재 거사를 논의하고 있을 무렵, 당진경찰 서 순사 니미야(二官) 다까시마(高島)가 와서 대형 태극기를 압수하려는 과정에서 일경의 권총 발사로 인하여 군중과 충돌이 시작되었다. 일인 순사의 총질 만행으로 흥분한 군중들은 행동총책 송재만의 지휘로 주재소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일본 순사들을 구타하였다. 그리고 일본 민 간인 ‘다지리’가(家)를 부수고 들어가 엽총 1정, 권총 1정, 탄약 약간을 빼 앗았다. 이들 거사 주동자들은 이규순 선생의 처남인 송전리에 거주하는 민재봉(閔載鳳)의 집에 모여 재차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왜군 헌병 수비대가 출동하여 대호지면으로 향하였을 때, 마침 서산군 정미면 대운산리(大雲山里)의 대운산교(大雲山橋)가 무너져, 보수의 책임 을 지고 일하던 이연종 이장(里長)의 고의적인 지연작업으로 인하여 진압 병력이 이튿날 새벽에야 도착하게되어 대호지 4.4운동의 주역인 독립지 사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4.4독립만세 후속 운동으로 4월 8일 다시 송전리 · 조금리 · 수당리에서 재차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일본 순경과 충돌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사상자 5명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악명 높은 일본의 헌병 · 경찰제도 아 래서 구속된 열사만도 300여명이 넘었으며 현장에서 학살되어 순국하신 분이 송봉운 외 3명, 옥중에서 고문치사 당하신 분이 이달준 · 박경옥 · 김 도일 3명, 확인된 수형인만도 5년에서 8월까지 36명, 태형 90대 이상이 90 여명으로 누락된 분까지 포함하면 150여명이 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규순 선생은 거사 후 처가(姜家)에 갔다가 왜경이 동네에 나타났다는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