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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교주 최시형(崔時亨) 선생이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 뒤 선생의 부친은 천도교 해미면(海美面)책으로 활동하다가 대호지면(大湖호面) 마 중리로 이주하여 1907년부터 실시해온 성미법 · 애국금 모금책으로 비밀리 에 활동하였다. 이규순(李奎淳) 선생은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당시 당진 천도교의 주 요인물인 송전리(松田里)의 백남억(白南憶)을 중심으로 홍순국(洪淳國) . 최정천(崔正天) . 김장안(金長安) . 이동하(李東夏) . 이달준(李達俊) . 민재 봉(閔載鳳) . 남기원(南基元) . 박성운(朴聖雲) 등이 주축이 되어 독립기금 을 헌납하는 등 서산 · 당진 등지에서 홍성으로 집중하는 항일 애국청년들 을 이끌었다. 선생은 일찍이 뜻을 세워 대호지변(大湖호面) 마중리의 도호의숙(義훨) 에 입숙하여 학문과 무예를 배우고 훈학(訓學)하였다. 선생은 송전리 구장 민두훈의 장녀(長女)이며, 대호지면(大湖효面) 서기 (書記)로서 대호지 4.4 만세운동의 주동자인 민재봉(閔載鳳)의 여동생인 민재원(閔載元)과 결혼하였다. 선생은 사성리의 의숙을 오가며 이대하(李大夏) . 이두하(李斗夏) 등의 애국지사와 뜻을 같이하여, 1919년 4월 4일 서산군 정미(貞美)면 천의(天 宜)장날에 있었던 독립만세운동 때에 선두에 서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꽃처럼 일어날 때 이곳 사람으로 고종의 인산(因山) 에 참례하기 위하여 상경(上京)하였던 이두하(李斗夏) . 남주원(南柱元) . 남계창(南햄昌) . 남상식(南相植) . 남상락(南相洛) 5인의 애국지사들은 서 울 파고다공원에서 3.1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내 고장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태극기 l매와 독립선언문 l통을 얻어가지고 귀향하 였다. 이를 계기로 면직원 중심의 민재봉(閔載鳳) . 강태원(姜泰元) . 송재 만(宋在萬) . 김 동운(金東공)을 비 롯한 남주원(南柱元) . 한운석 (韓雲錫) 등 이 만세운동 거사의 구체적인 계획을 섹웠다. 당시 면장 이인정(李寅1E) . 면서기 이대하(李大夏)를 비롯한 지방유지 중심으로 독립운동추진위원회 를 구성하고 거사 일자를 4월 4일로 결정하였다. 대호지면은 바다를 이용한 교통로 외에는 외부와의 관계가 단절된 오지 라고할 수 있는 지역이었으나 손병희 선생이 숨어 활동한 천도교 부흥지 역으로 만세규모와 조직적인 움직임을 살펴볼 때 대규모 시위운동이었다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