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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하여 오세학(吳世廳) 등은 전신주 3개를 도끼로 찍어 버렸다. 그리고 군중들은 양성 읍내에 거주하여 고리대금을 하는 일본인 융수지(隆秀知) 의 집을 비롯하여 일인 상점을 파괴하였다. 다음은 양성면 사무소로 들어 가 호적원부를 꺼내어 소각하고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돌아온 선생은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 사무소의 건물을 파괴 ·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 반 · 건조물 소훼 · 소요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 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 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子) 이규하(李圭夏) , 자부(子歸) 이상섭, 손(孫) 종국(鍾國) , 손부(孫歸) 한금숙(韓鎬淑), 증손(曾孫) 건우(健雨) . 초 희 (初喜) . 은희 (銀喜)가 있다. 。 參考文敵 : 獨효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75-177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422-482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2卷 521面 33) 이 규 순(李 奎 淳) (1894. 9. 7 - 1967. 5. 2) 140 부천독립운동사 이규순(李奎淳) 선생은 충남 서산군(瑞山那) 해 미면(海美面) 홍천리(紅폈里) 이선설(李善I홈)의 3 남 중 2남이다 선생의 부친 이선설(李善禹)은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동학군에 가담하여 공주에서 관군 및 왜 군과 싸우다가 실패한 뒤 스승 최시형(崔時亨)선 생을 모시고 홍성 · 서산 · 당진 등지에서 숨어다 니면서 동학의 부흥을 도모할 시기에 동학에 가 담하여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