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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j휠폐j史資料集(國家報勳處) 쟁13輯 94 -121 . 1421돼 獨立立겪 功者功勳錄(國家報勳앓) 第10卷 2371폐 尹允FIJ 선생의 孫 尹保光씨 끊言 32) 이 국 상(李 國 相) (1884. 5. 18 - 1937. 10. 30) 이국상(李國채) 선생은 경기도 안성(安城)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9년 4윌 1 일 이우석(李祐奭) . 홍창섭(沙昌燮) . 최은식(崔股 植) . 이희용(李꽤龍) 등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양성면(陽城뼈) . 원독면(元 감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 시위는 처음에는 양성면(陽城llil)과 원곡면(元감때)이 별도로 시위를 벌였다. 선생은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 리(外加川띤)에 있는 원독면 사무소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 두로 등불과 햇불을 들고 양성읍으로 향하여 만세시위 행진을 하는데, 불 빛의 장사진은 큰 장관을 이루어 기세가 하늘에 닿을듯했다. 1천여 명의 만세행렬이 양성면과 원곡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 · 최은 식 · 홍창섭 · 이덕순. 이근수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하였고, 양성변에 있는 주재소 · 우편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연설의 내용은 “우리가 서로 기약 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요, 우리는 양성 주재소로 가서 일본 순사들을 끌어내어 같이 대한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또 대한독립국이 생기면 일본의 야만적 독립정책을 수행하던 관청은 필요 없소.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앞잡이 인 면사무소 · 주재소 · 우편소 등을 모두 때려 부셔야 하오 그리고 양성 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하오” 하며 열변을 토하였다. 이들 원곡면의 시위군중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東桓뿔)에 있는 양성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 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시위군중이 경찰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선 생은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부 군중들은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다시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곳의 건물과 기 물을 파괴 · 방화하고 일본인 경찰에게 조선 두루마기를 입혀 군중 앞에 끌고 나와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또한 안성과 통화 연락을 막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