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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명단에 그 이름이 살려 있다. 선생은 이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 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과 학대를 감수하며 6개월의 징역을 살고 출옥 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 후 선생은 우리 민족에게 우리글을 가르 치기 위하여 교육자의 길을 가던 중, 강화보통학교 동창생의 연락을 받고 그 당시 인삼포 경작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가지고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땅 곳곳에서 활약중인 애국지사들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교환하고 물심양 면으로 그들을 도와주다가 수년 후에 귀 향하였다. 귀향 후에도 단발령과 창씨개명에 불응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그 런 와중에서도 밤에는 마을 학당에서 우리 한글을 가르쳤다 1940년 초 양도면장 유은구의 집에서 있던 변 유지들과의 회의석상에서 “2차 세계대전은 곧 끝날 것이며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 며, 이승만 박사 · 김구 선생 · 서재필 박사 등이 귀국하여 우리나라를 이 끌어갈 것이다”라는 말이 도화선이 되어 강화경찰서에 끌려가 수주일 동 안 고문을 받고 반죽음이 되어 귀가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고이 간직하였던 태극기를 꺼내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수없이 외치고 내려오다가 실수로 떨 어져 온몸을 다쳐 6개월 동안 고생하였다. 광복 후 양도국민학교 교장으로 교육 일선에서 헌신하던 중 일제의 만 행에 의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이 악화, 1947년 8월 14일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윤보광(尹標光) . 충구(忠九) . 일여 (一女), 손부(孫웹) 이 장옥(李貞玉) , 증손(曾孫) 성 호(成晧) . 태 호(泰晧)가 있다. @ 參考文않~ : 맞IJ決文(1919. 1 l. 6. 京城地方핑院) 며굶않l獨立j필動1史(文-~) 獨立運動l史(國家報勳處) 第2卷 105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183 . 191 떼 獨立運動j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8-82 . 88-95面 138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