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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윤 윤 용(尹 允 用) (1900. 8. 14 - 1947. 8. 14) 윤윤용(尹允用) 선생은 경기도 강화군(江華 컴ß) 양도면(良道面) 사람이 다. 파고다 공원에서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선언과 대민족항전(大民族抗 戰)을 전개할 것을 결의한 것은 고종황제(高宗 皇帝)의 서거와 그 장의(賽展)를 위한 망국 민 족의 분노에 의한 발로였다. 선생은 당시 19세로 서울 선린상업학교(善l憐 商業學校) 2학년 재학 중 3월 1일 서울 탑동(搭洞: 현 탑골)공원에서 독 립선언문이 낭독된 후,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하면서 일경과 헌병의 무력 저지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시위를 하다가 피체되었다. 고종(高宗)의 출상이 3월 3일로 내정됨으로써 전국에서 많은 봉도객(奉 導客)이 서울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선도적 가두 투쟁이 더욱 효 과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일제는 2월 28일 이후 소위 위험 인물로 지목되는 학생들을 구속하기로 내정되었을 뿐 아니라 학생들이 고종(高宗) 국장(國賽)에 참례하였을 때 발동할 수 있는 취체방법도 결정해 두고 있었다. 3월 1일 하오 2시에 손병희(孫秉熙、) 이하 민족대표들은 예정대로 파고 다 공원에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일 갑자기 사 정이 변경되어 민족대표들은 인사동 명월관 지점에 모여 학생 및 군중과 는 별도의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갑작스런 상황 변경에 직면 하여 학생과 군중은 독자적으로 3월 1일 2시 30분경에 이미 투쟁 조직에 참여한 바 있던 지도급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엄숙히 독립선언식을 주도 하였다. 이로부터 학생들은 가두 투쟁 · 선전활동 · 군중의 조직 · 동원을 지도하 게 되었다. 시위대는 여러 대로 나뉘어져서 광화문 · 종로 · 대한문 앞 · 미 대사관 앞·프랑스 영사관 앞·서대문 ·서소문·남대문·동대문 방면 등 서울 각 곳에서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제의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때 선생은 3월 1 일 서울시내의 학생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청년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