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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기독교인으로 유희철(劉젠哲) 선생은 당시 27세 의 선원(船員)이 었다. 그들은 장날인 3월 18일을 기하여 읍내 시장에서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 다. 3월 l7일 유봉진과 선생 등 수명은 동면(同뻐)의 장윤백(張允伯)의 집 에 모여 각자 구 한국 국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지휘, 선동 하기로 하였으며, 이튿날인 18일이 되자 유희철(劉펜哲) 선생과 황일남 · 황윤실 · 장동원 · 장명순 등은 일본관헌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삼삼오오 전기한 시장에 모여, 이날 오후 2시경에 많은 군중이 모인 곳에서 나누어 가진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열광적으로 불렀다. 또한 이 시장 부큰 에 있는 종루(拉樓)에 올라 큰 종을 난타하며 선생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천으로 만든 기를 떠받들며 만세운동을 선도하다가 유희철 선생과 조 기선 등은 검거되었다. 시위대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달려온 강화경찰서 순사보 김덕찬(金 經、贊) . 염이선(顧複훤) 등에게도 같이 만세 부를 것을 강요하였으나 이들 이 거절하자 구타하기도 하였다 시위군중들은 시장 · 군청 · 객사 · 공자묘로 돌아다니며 시위하였으며, 군청에 몰려옹 것은 약 5- 6천명이 일단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군중들 은 읍내 각처에도 가득 차서 총 수효는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 다. 또 시위 군중과 유봉진은 경찰서로 가서 앞서 체포된 유희철 선생과 장상용 · 조기신 등을 석방하라고 2시간 동안이나 담판하여 결국 일경은 그들을 석방하였다. 강화읍내의 시위가 군수와 진압경찰의 책임자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할 만큼 강력하게 일어나자 인천 수비대에서 응원병력으로 경찰 10여 명과 서울 용산에 주둔하던 군대병력 40여명이 파견되었다. 시위대의 숫 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경찰은 시위행렬과 직접 충돌은 피하였으며, 응 원병력이 도착하자 일제는 주동자를 색출 연행하고 장터에서 돌아가는 사 람들을 체포하였다. 3월 18일 강화읍 장터의 시위는 온수리 지역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일 으킨 운동으로 3월 20일 까지 그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이 운동은 강화 전역으로 퍼져나가 교동면은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이나 지속되었 다. 다시 강화도 전체와 인근 도서로 옮겨가 3월 27일의 시위는 2,000여명 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로, 시위 양상도 과격해졌으며 각지에서 시위군중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