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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 이르자 날로 장비와 병력을 증강하는 일군(日軍)에 중과부적 으로, 의진을 해산하고 고향에 돌아가 지하운동을 계속하다가 1916년 체 포되어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전주지원(全州支廳)에서 15년형을 받 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大統領 表影, 1990년에 建國 勳章 愛族章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부(子歸) 박기묘(朴奇妙) , 손(孫) 유찬상 (柳贊相), 손부(孫輝) 전연화(全運花) , 증손(曾孫) 혜진(惠進) . 혜미(惠美) 가 있다. @ 參考文敵 : 光'l'1‘|地方法院 全州支廳判決文0917. 2. 8) 騎廳隨筆 109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914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卷 777面 30) 유 희 철(劉 熙 哲) (1893. 3. 13 - 1942. 8. 2) 유희철(劉熙哲) 선생은 경기도 강화군(江華 那) 길상면(吉램面) 선두리(船頭里) 사람이다. 강화군 부내면, 즉 강화읍에서는 1919년 3월 5-6일에 많은 군중이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 를 전개하였다.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독립선언을 발표하 고, 이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전국 각 곳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음을 전해들은 길상면 온 수리(吉神面溫水里)의 유봉진(劉鳳鎭)은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예수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유부(黃有 富) . 황도문(黃道文) 등과 회합 만세운동할 것을 모의하고 동지를 규합하 였다 3월 9일 온수리 감리교회당에는 유봉진 · 황도문 · 임성오 · 유희철 · 장 흥환 등 십수명이 모였으며, 이 자리에서 경성에서 온 조경환은 경성의 시위상황을 설명하고 강화도에서도 궐기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이 13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