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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유만조(柳萬祚)가 있다. @ 參考 文鳳 : 判決文(1913. 9. 15 人邱地方파院) 每 日 며報(1913. 8. 19) 日 팎慢略 F韓國36年史(國*-編흉委員짤) 第2천 293따i WIl義土傳(뼈Il基元著) 獨J.i.有功者功헐값U錄(國家報혔J處) 第1卷 756며j 29) 주 t o π 석(빼l 俊 石) (1885. 9. 30 - 1971. 11.3) 이 명 : 준석 (浚錫), 자(字) : 공범 (公範) 유준석(柳俊石) 선생은 전라북도 완주(完州) 출 신이다. 청 · 일전쟁에 이어 노 · 일전쟁에 승리한 일본 은 한반도 내에서 우위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자신감을 획득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Zc條 約)을 늑결하는 등 침략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 러내게 되었다. 이에 완주군 비봉면(完州那飛鳳面)에 거주하던 유준석(柳俊石) 선생을 위시한 유씨 일문(一門)의 청년들 9인은 일제의 야욕을 분쇄시킬 구체적 전략을 논의하였다. 1906년 10월경 선생은 유명석(柳命錫) 등과 더불어 의진을 구성하여 익 산(益山) 군내에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다. 1907년 9월 유지명(柳志明)과 합세하여 의병대를 조직하여, 연산 · 고 산 · 용담 · 금산 · 진안 · 익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무력으로 항전하여 다대 한 전공을 세웠다. 선생은 1906년 10월과 1907년 5월에 이봉승(李奉承)의 집에서 2차례, 그 리고 1907년 10월 유현석(柳셨錫) 등 7인과 더불어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碼山面源水里)의 노상에서, 또 동월에 한홍수(韓興洙)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