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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일인학생과 한인학생의 차별정책 개선, 한인교사의 확대 등을 주장하 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7월 이 사건의 주도자인 오일 규 선생은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한 좌익협의회의 회원들이 다수 학사처분을 받게 됨과 동시에 일제의 감시강화로 통회의 활동이 위축되자, 동년 9월 18일 정종호 · 강봉주 · 한정희 · 박희남 등과 함께 조직 재건에 합의하여 <예산 학생동맹(禮山學生同盟)>을 새로 조직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은 지역별 항일학생 운동조직과의 연계를 목적으로 동교 내의 5학년생과 3학년생들 을 동지로 규합하였으며, 밖으로는 지방의 청년동지와 서울 YMCA를 비 롯한 외지의 학생조직과 연계를 강화하는 등 학생운동의 기획과 기밀조직 의 관리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일본 경찰이 감시를 강화하여 조직이 노출될 위기 에 처하게 되자, 선생을 비롯한 회원들은 동년 11월경 조직관리의 위장방 법으로 비밀결사의 명칭을 회합일인 토요회(土魔會)로 개칭하는 한편, 지 방의 민족청년들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반일투쟁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1932년 11월 중순경 일제의 관제연극단체인 극단 만경좌(萬 鏡座)가 예산군 예산면 시장터에서, 일제가 만주(滿洲)의 마적(馬戰)으로 부터 재만(在滿) 한인을 보호한다는 반민족적 내용이 담긴 ‘동방의 빛’이 라는 연극을 공연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회원들과 함께 이 연극 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공연관람 거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 극단에 공연 중단을 요구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극단원들과 충돌한 사건으로 1932년 12월 25일 선생을 위시하여 강봉주·정종호·한정희 · 박배룡·김규환·박정순·박희남·김 형래 등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선생은 1933년 3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5월 21 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 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 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子) 오종인(릿찮仁) 자부(子함) 지부례 (池춤’禮) , 손(孫) 오사라가 있다. ill. 광복후 부천 거 주 독 립운동가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