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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決文(1919. 7. 17 高等i1,;院) 獨 lii펀꾀b史(國家報勳j處) 第3흉 117 . 118 安時鳳 선생의 孫 安慶錫씨 꿇름 26) 양 한 위 (梁 漢 韓) (1883. 4. 12 - 1949. 4. 3이 양한위(梁模韓) 선생은 충북 옥천(ì'7i:)[ 1) 사람 이다. 선생은 경술국치(康成國따) 이후 독립만세운 동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19년 3.1독립만세운 동으로 독립에 대한 기대가 국내외로 증폭되자, 그 해 9월경 경북 영천(永) [ I )역 부근에서 권태일 (權泰鎔)과 만나 독립쟁취를 위한 방법을 모의하 였다. 이들은 국내에서의 무장투쟁과 상해 임시 정부(臨時政府)를 위한 군자금 모금을 행하기로 결정하고, <독립신문(獨立新 聞)>과 경고문 등을 허병율(許秉律) . 조선 규(趙善奎) 등 부호 앞으로 발송하고 대구(大邱) 시내에 경고문을 살포하 였다 그후 1920년 10월 선생은 오기수(吳觀洙) . 권태일(權泰錯) 등과 군자금 을 모금하여 허병율(許秉律)로 하여금 8천원을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토록 하였으며, 조선규(調善奎)를 설득하여 독립운동조직에 가담시키고 군자금 을 헌납케 하였다. 1921년 1월 하순경에는 대구에서 동지인 권충락(權忠洛)을 만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달성(達城)의 부호인 최재교(崔在敎)를 협박하여 3만원의 헌 납을 요구하고 그중 일부를 수령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2년 5월 27일 경북지방에서 모금활동을 하던 중 일경에 체포 되어 동년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부(子歸) 한동임(韓東없) , 손(孫) 양병무 (梁炳武)가 있다.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