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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25일 출옥 후 동지 민창현 등과 국내는 물론 중국 동삼성 (東三省)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3월 26일 일경에 피체 되어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하였다. 그러나 대전 형무소 가 전쟁 중에 화재로 인해 모든 서류가 소실되어서 근거 자료를 찾을 수 가 없는 안타까운 실정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부(T歸) 이도화(李挑花) , 손(孫) 안경석 (安慶錫), 손부(孫歸) 최 옥순(崔玉順) , 증손(曾孫) 덕 진(德福) . 덕 훈(德訓) 이 있다 <추기> 1989년 6월 27일 광복회와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천원군 입장면 양대리에 830 평 규모에 9m 높이의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세우기로 발기하고, 1990년 4 월 27일 제막식을 가졌는데 천원군 군비(部費) 1憶3千餘 萬원과 추진위원회 모금 3千6퍼萬원으로 이루어졌다. 이 비(li찌)는 안시봉 선생 및 광부 2명(김병열 · 김채준)과 교사 1명 (강기형) 학 생 3명(민옥금 · 한이순 · 황금순) 기타 1명 (조쌍동 )등 8명이 일으킨 3월 20일 만 세운동과, 광부 4명(안은 · 박창신 · 백학서 · 한근수)과 기타 3명(신일성 · 남기철 · 김 모)등 7명이 일으킨 3월 28일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15명이 주동 이 되어 만세운동을 벌이다 3명이 일본헌병의 총에 맞아 순국한 사건으로 이 만 세운동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잊혀졌다가 최근 당시 재판기록을 찾아낸 것 을 계기로 이 지역 주민과 후손 42명이 앞장서서 기념비 건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때 김영삼 전 통일민주당 총재 · 박태준 전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 방우영 조선 일보 사장 · 신용하 문학박사(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 비문 제작)의 각별 한 후원을 받아 힘입은 바 크며 행사장에는 이광훈 광복회장 · 김종필 민자당 최 고위원과 민자당 국회의원 김종식 · 김문원 · 정일영 · 윤성한 · 김홍만 · 윤재기 · 유기수 의원과 심대평 충남지사 · 윤승열 군수 · 안승훈 · 조선일보 상무 및 주민 1천 여명이 참석,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내용 일부발훼 : 조선일보 1990 년 4월 28일자) @ 參考文鳳 : 判決文0919. 4. 28 公州地方설院) 判決文0919. 6. 8 京↓gz覆審法院) 128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