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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敎), 증손(曾孫) 안균(安均) , 증손부(曾孫歸) 권봉자(權鳳子) 고손(高 孫) 유신(抽信) . 익 진(寶鎭) . 우남oz.南)이 있다. @ 參考文願 : 騎廳隨筆 29 . 31 . 33 - 36 . 38面 獨立運폐1史(國家報勳處) 第1卷 163 . 164 . 259 264. 269-276面 獨立運폐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輯 191 .349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卷 710面 25) 안 시 봉(安 時 凰) (190l. 10. 5 - 1944. 8. 7) 안시봉(安時鳳) 선생은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으로서 천원군 입장면 양대리(天原那 쏠場 面 良똘里)에 거주하였으며 직산 금광(樓山金鍵) 의 광부 및 미곡상을 하였다. 일제치하의 많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구조 활동을 하며 지내던 중,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 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양대리 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처소에 서 태극기를 만들며 거사준비를 갖추어왔다. 1919년 3월 20일 오전 10시경 선생은 광명학교 교사 강기형과 광명학교 여학생 3명(민옥금 · 한이순 · 황금순) 등 7명이 주동이 되어 양대리 장터 에 나가 70여 명의 군중들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으며, 이어서 민옥석(閔玉錫) 등과 합세하여 입장장터로 달려나가 군 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이때 독립만세의 함성이 십여리 길에 가 득 메아리 쳤다고 한다) 행진을 벌였다. 급보에 접한 천안헌병대와 일대 충돌을 빚어 남자 40명 · 여자 10명이 체포되었으나, 일부는 입장시장에 이르꾀 약 700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 세를 절규하며 일대 시위를 벌였다. 선생은 이때 체포되어 그해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 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았고 동년 6월 경성법원에서 원심판결을 부 분 취소하고 1년형을 언도 받았고 동년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