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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너희들 일신의 임무가 이 얼마나 중한 것이냐. 너희들은 전일의 그 몸으로 생각지를 말고, 하늘의 멍을 받들어 일한다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며 독려하였다. 이즈음 의병을 해산할 것을 권유하는 선유조칙이 내려왔다. 이에 주화 론(또和論)이 일어나게 되자 선생은 “이 무리들은 모두 왜의 형상을 하고 국모를 시역한 자들이니 우리가 이 들 적을 토벌하는 것을 반드시 왜보다 먼저 하여야 할 것이다" 고 주장 하여 주화론은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4월 초순부터 경군(京軍)이 내려와 형세는 더욱 어려워졌다. 의진의 일 부에서 본진을 제천에서 조령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비등하였으나 선생은 “영남으로 가는 것은 이될 것이 없고 적에게 약점을 보이며, 또 제천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백성들이 그동안 힘을 다하여 군수품을 공급하고 크 게 기대하는 터인데 일로에 버리고 갈 수 없다" 하고 극력 반대하여 그 대로 제천에 머물게 되었다. 1896년 5월 23일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였다. 의진은 수비책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경군(京軍)은 의병진의 파수가 있는 곳을 만나면 우회하여 뒤로 나와서 바로 제천읍을 향하니 대전할 겨를도 없이 이미 의병 주둔처 갚숙 이 들어왔다. 5월 24일 비가 와서 주무기인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었다. 25일 선생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 새로 쌓은 남산성에서 싸움을 독려하 여 손수 화약을 재어 군사들에게 주면서 격려하였다. 의병의 사기는 다시 충천하였으나 바람의 방향이 불리하게 되어갔으며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내렸다. 의병의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적의 총탄은 비오듯이 쏟아졌다. 이에 선생은 돌을 던지며 대항하다가 분을 참 지 못하고 “창의 중군 안승우는 여기에 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면 빨 리 오너라” 하였다. 결국 선생은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 니 향년 32세였다. 이때 선생의 제자로서 중군 종사로 활약하던 19세의 청년 홍사구(供思 九)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안봉희(安鳳熙) , 손부(孫隔) 이인교 126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