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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장 : 김백선 좌군장 : 원규상 중군장 : 이춘영 전군장 : 안승우 후군장 : 신지수 1896년 2월 15일 충주로 진격할 것을 결의하고 이튿날 행군하여 17일 일거에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입성할 수 있었다 입성한 이튿날부터 적의 공격은 시작되었으며 2월 23일 적 수백 명이 달천(鐘) 11 )에 이르렀다는 보 고에 접하자 이춘영이 나아갔다. 이들은 조령 및 수안보에서 접전하였는 데 교전 중에 이춘영이 전사하였다. 이춘영의 시신을 본집으로 보내고 이 춘영의 뒤를 이어 중군장으로 임명된 선생은 남산을 파수하였다. 2월 29일 적의 병력이 증가하여 남산을 파수(把댄)할 수 없게 되어 철 군하니 적군은 충주성 바로 아래까지 육박해 들어왔다. 이에 입암 주용규 (朱庸奎)가 나아가 접전 중에 다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의진은 분전하여 적을 멀리 쫓을 수 있었다. 3월 2일 적의 공격이 재차 감행되자 철군할 것을 결의하고 3월 5일 달 천을 거쳐 청풍(淸風)으로 들어갔으며 8일 제천에 이를 수 있었다. 3월 16일 가흥(佳興) 방면으로 총 공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백선을 중심으로 하여 후군과 좌 · 우군이 합세하기로 작전을 구상하였다. 그런데 김백선은 전세를 보고서 증원군을 요청하고 군대를 머물렀다. 본진에 있던 중군장 안승우는 “계획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요는 시기를 보아 결정하여야 할 일이요, 군 샤가 적응을 말할것이 아니다. 더구나 중심지지(中心之地)를 비우고 많은 군사를 보낸다는 것은 그릇된 계산이 아니겠느냐“ 하며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김백선 의진의 역부족과 지휘부에 대한 불만 그리고 각 의 진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에 가흥 진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제천 본진에서는 후방 대책으로서 단양 · 청풍 · 원주 · 영월 · 평 창 · 정선 · 지평 등지에 수성장을 임명 배치하여 해당 읍성을 장악,관리하 고 군사의 소모와 군수물자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내적으로 동요하는 군사들의 마음을 무마 격려하고 대열을 정 비하였으며 군사들의 민폐를 방지하여 군민(軍델)협력을 강화하는 데에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선생은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군사들에게 “국모의 형체가 재가 되고 말았는데 저 승 의 흔맥이 너희들만을 바라고 있다. 군부(君父)께 서 형상을 변하여 오랑캐의 모습을 하였는데 천지신멍이 너희들만을 바라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25.